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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람사에서 온 편지] 3화 - 조용한 응급실의 의미

2016.12.22

©국경없는의사회

4월 29일 새벽 4시 반, 새벽을 깨우는 모스크 확성기 소리에 오늘도 어설피 잠에서 깼다.

오늘은 알주마(금요일, 우리나라의 일요일 같은 아랍국가의 휴일로 이 날은 모스크에 다녀오는 무슬림이 많다.)의 아침이라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얄궂게도 모스크 확성기의 기도는 오늘 따라 더욱 정성껏 크게 울려 퍼졌다. 모스크는 우리 숙소 바로 옆집이다. 아침에 일찍 깬 김에 새벽 공기도 마시고, 옥상에서 일출도 보며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국경없는의사회

아침 6시 반,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무사하냐고?'

시리아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가 후원하는 병원이 폭격을 당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듣고, 안부를 물었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이 경악스러운 비보가 다시 전해졌다. 어제 이미 전해 들은 팀원도 있었고, 아침에 소식을 듣고 혀를 내두르는 팀원도 있었다. 여기에서 600km가량 떨어진 시리아 북쪽 알레포 지역에서 발발한 사태라 시리아 남단 국경과 접해있는 이곳에는 직접적인 영향은 없지만, 다소 긴장감이 느껴졌다. 낮 12시 반, 여느 때와 같은 차분한 아침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일이지만 병원에서 간단히 회진을 돌고, 다음 한 주의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다. 점심 시간이 되니, 현지 의료진들과 요르단 대표음식인 만사프를 시켜 먹는다. 따뜻한 요구르트 수프를 묻힌 밥을 손으로 오물조물 쥘락펼락하며 주먹밥을 만들어 먹는데, 바람 불면 흐트러지는 쌀밥이라 생각만큼 잘 주먹밥으로 쥐어지지는 않아 식탁 위에 잔뜩 흘리면서 먹는 게 좀 창피했다. 근데, 주위를 보니 요르단 친구들도 똑같이 흘리면서 먹는 걸 보니 그냥 이렇게 먹는가 보다 싶다. 쾌활한 젊고 밝은 의사들이다. 왁자지껄 농담하며 식사와 차를 즐기니 그저 너무나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이다.
 

©국경없는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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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를 나누는 국경까지는 7분

저녁 6시 반, 응급콜 없는 평온한 휴일 날이다. 저녁 식사를 해먹을 장을 보고 왔다. 숙소의 모든 팀원이 한자리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날이다. 오늘 식사를 해주기로 자청한 의료팀리더가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에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그 중 몇 조각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다. 들고양이들 밥 주러 간다. 숙소 담장 안팎으로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대여섯 마리 된다. 선임 외과 선생님이 미션을 마치고 귀국하며 고양이 집사 자리를 나에게 물려주고 가셨다. 밤 9시 반, 스파게티와 바게트요리에 이어 달콤한 후식을 조금씩 맛보며 음악과 차를 음미하는 시간이다. 다소 쌀쌀한 저녁날씨지만, 밖에서 먼지 쌓인 탁구대(네트도 없고, 아무도 탁구를 치지는 않는다)를 식탁 삼아 둘러앉아 휴일의 느긋한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다.

한 순간 둔탁한 괴성이 들렸다. 부움!!! 언덕너머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이다. 숙소에서 눈 앞에 멀리 보이는 언덕은 시리아와의 국경이다. 요르단의 람사에서 국경까지 5km, 국경에서 시리아의 다라까지 3km. 다라는 내전에 휩싸인 주요 도시 중의 하나이다. 첫 폭발음의 놀람이 가시기도 전, 5분 정도 지나서 한 번 더 같은 폭발음이 들렸다. 부움! 중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폭탄이지 않을까 추측한다고 옆에서 이야기했다. 지난 폭격 때는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대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리아에서 기초 응급조치 받고, 밤중에 국경 검문 받고 하면 내일 아침에나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내일을 대비해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다친 환자가 없거나, 모두 사망했거나

©국경없는의사회

다음날 아침 6시 반, 알람 소리에 부스스한 눈으로 잠을 깼다. 밤에 혹시나 응급 콜을 놓친 건 없나 싶어서 두어 번 깨다 자다 하며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가지에서 이런 폭발음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평범한 토요일이 시작되었다(여기는 금요일 토요일이 주말인데, 국경없는의사회 의료진은 정상근무한다). 7시반 출근을 하고, 전체 회진을 돌고, 정규 수술을 시작한다. 낮 12시 반, 여전히 응급실은 잠잠하다.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이송할 만큼 크게 다친 환자가 없거나, 아니면 이송되기도 전에 환자가 모두 사망했거나. 그저 전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람사의 옆 도시인 요르단의 이르비드에서 출퇴근하는 수술실 간호사와 이야기를 했다. 두 달 전에 본인의 주택 멀지 않은 곳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있어 요르단 경찰과 대치했다고 한다. 요르단 경찰의 신속한 대처로 시민 사상자 없이 하룻밤 만에 진압되었다고 하는데, 총알이 빗발치는 그날 밤 너무 무서워서 가족 모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의 시리아에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저녁 6시 반, 숙소에서 국경을 바라본다. 국경너머의 재앙은 사람이 만들고 있는 재앙이다. 전쟁터에서의 군인들의 전쟁도 그것만으로도 큰 재앙인데, 일반 시민들이 생활하는 시가에서의 무차별 공격은 어떤 명분도 가질 수 없는 범죄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동할 수 없는 환자들과 생명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의료진이 있는 병원에까지도 폭격이 가해지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도 놓아버리는 행위이다. 인류 전체의 지울 수 없는 자해의 상처가 될 것이다. 저기 보이는 국경까지 7분 거리. 이 7분을 사이로 평화의 땅과 시가지 곳곳에 폭탄과 총탄과 지뢰가 깔려있는 죽음의 땅이 갈리고 있다. 국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씁쓸하다. 


웹툰 [보통남자, 국경 너머 생명을 살리다]

©국경없는의사회


이재헌 | 국경없는의사회 의사

정형외과 전문의로, 2016년 요르단과 아이티에서 국경없는의사회의 의료 구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전부터 국제 구호활동에 관심이 많아 탄자니아를 비롯해 네팔, 필리핀 등지에서 의료 지원 활동을 해왔다. 올해 요르단에서 시리아 전쟁으로 인해 외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겪고, 느낀 이야기들을 일기로 적었고, 그 일기는 김보통 작가의 웹툰으로 재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