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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제 아들이 제 품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2017.04.04

아흐마드 알-물라 박사가 코바니 병원에서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 Jamal Bali / MSF

2017년 4월 4일

시리아 북부 라카에 사는 사람들은 격렬한 전투 한가운데 사로잡혀 있다. 6년간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폭격·박해·공개 처형을 겪어 왔다. 더 안전한 지역으로 가기 위해 수천 명이 목숨을 걸고 검문소를 넘고 지뢰밭을 지나고 있다. 모하메드(35세)[i]는 고통스러웠던 탈출 과정, 그리고 가족들이 치러야 했던 뼈아픈 대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라카 시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교전선이 라카에 가까워지고 시내에서 공습이 벌어지는 것도 보게 되면서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하루는 마트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누가 와서 그러더군요. 도망을 가고 싶으면 농부들 천막에 가서 일단 몸을 숨긴 뒤에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튿날 저는 아내와 아이들 넷을 데리고 농부들이 캠프를 치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엔 거기서 묵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시리아 민주군(SDF)이 통제하는 지역 쪽으로 가려고 차를 구했습니다. 거기까지 우리 가족을 데려다 주는 대가로 저는 운전기사에게 10만 시리아 파운드(440유로)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 돈이 제가 가진 전부였죠. 하지만 그는 이내 우리를 길가에 버려 두고 가버렸습니다.

얼마 후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나이 든 두 분(남·녀)을 보았습니다. 그분들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들도 탈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불러 세워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분들이 오토바이를 빌려 주셔서 우리 아이들을 시리아 민주군 검문소 북쪽으로 데려갔습니다. 제가 큰 아들과 딸 아이를 태우고 검문소까지 갔고, 나머지 식구들은 걸어오기로 했습니다.

100미터쯤 갔을 때 오토바이가 지뢰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제 아들은 의식을 잃고 이마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딸 아이는 눈에 부상을 입었죠. 저는 턱, 목, 두 손을 다쳤습니다. 저는 쓰러진 아들을 부축했고, 제 아내는 딸을 안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길가로 지나가는 차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어떤 차든 상관없었죠.

 

코바니 지역에 보이는 잔해들 ⓒ Jamal Bali / MSF

 

제 아들은 제 품에서 죽어 갔습니다. 결국 아들은 숨을 거뒀고, 저는 아들의 시체를 그곳에 두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차가 지나가는 지점에 서 있다가 한 차의 도움을 얻어 마즈라트 티쉬린(Mazra't Tishrin, 라카 시에서 북서쪽으로 23km 지점) 마을에 있는 의사 선생님에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우리는 라카 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라카 병원(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은 아님)에 도착하자 IS 일원이 우리의 입원을 거부했습니다. 제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제게 수갑을 채우고 “죽게 내버려 둬.”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2시간 후, 저는 의사 선생님에게 제게 와서 치료해 달라는 몸짓을 했습니다. 목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말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울기만 할 뿐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명령을 듣지 않으면 살해 당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한 사령관이 나타나더니 의사더러 저를 치료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드디어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상을 입은 IS 일원이 실려 들어왔고, 의사 선생님은 그를 치료하는 데 불려 갔습니다. 하지만 이내 의사 선생님이 돌아와 제게 사과를 구하며 치료를 끝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말했죠. 저를 치료해 준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요.

이곳 의사들은 너무도 겁에 질려 있습니다.

저는 사흘간 병원에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와서 좀 어떠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제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의사 선생님은 제게 돈도 좀 주었습니다.

며칠 후 저는 집에 돌아와 다시 시장으로 일을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제 아들이 죽은 이야기며 제 딸이 다친 이야기도요. 한 남자가 시장에 오더니 저를 북쪽에 더 안전한 지역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과연 이 사람을 믿어도 될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그 사람은 제게 주소를 적어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들을 그곳까지 안전하게 무료로 데려다 주겠다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를 믿기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그는 우리를 차로 라카 시 밖으로 데려다 주면서 검문소를 피해서 갔습니다. 우리는 잠시 그의 어머니 집에 들렀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려 드렸더니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시며 제가 당신 아들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에게 우리 가족을 시리아 민주군 검문소까지 꼭 안전하게 데려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그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은 채 검문소를 향해 운전해 갔습니다.

우리가 검문소에 가까이 가자 그들은 공중에 총을 두 번 쐈습니다. 우리가 멈춰 서자 그들은 계속 운전해 오라는 뜻으로 횃불 신호를 보냈습니다. 감사하게도 길가에는 전혀 지뢰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 키네이자트(Al Khineizat) 검문소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검문소에 도착한 우리는 모두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시리아 북부의 한 캠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지금까지 한 달 정도를 지냈습니다. 캠프는 안전하지만 금전적으로는 어렵습니다. 가끔 일을 구해 다만 얼마라도 벌이를 하지만, 딸 아이도 안과의사를 찾아가 봐야 하고 저도 손과 턱이 골절을 입었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라카 시내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보고도 싶습니다. 그래도 제 집이 거기 있고, 그곳이 제가 태어난 곳이니까요.

국경없는의사회 팀들은 아일 알 아랍/코바니, 탈 아비아드, 만비지 지역에 위치한 의료 시설 9곳을 지원하고 있으며, 라카 시에서 북쪽으로 50km 지점에 위치한 아인 이사(Ayn Issa) 지역의 진료소에서는 격렬한 분쟁으로 집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료 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i] 이름은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