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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프리카공화국: “끊임없는 긴장에 시달린, 가장 힘든 현장 프로그램이었어요”

2014.02.18

제시 가프릭(Jessie Gaffric) 은 방기 코뮤나테르 병원에서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최근에 복귀했습니다. 두 세력 간의 다툼을 넘어 폭력과 증오가 공동체 전반에 번져나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상황은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제시는 예멘, 콩고민주공화국 등 폭력과 분쟁이 벌어지는 나라들을 여럿 경험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지만, 이번이 가장 힘든 임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방기에서 일하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큰 문제는 치안이 불안하다는 점이었어요. 이를테면 오후 6시 통행금지 이후에는 병원에 있을 수 없어요. 너무 위험하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있을 수 있는 11시간 동안 하루 일과를 끝내야 해요. 어쩔 때는 수술실에 꼼짝없이 갇혀 있거나 황급히 철수해야 했어요. 시간의 압박 때문에 수술을 이튿날이나 심지어 며칠 뒤로 연기해야 할 때도 많았어요. 치안이 불안하니 밤에 병원에서 일할 직원이 거의 없었어요.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면 의학적인 모니터링도 미처 마치지 못한 채 환자를 병원에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죠. 다음날 우리가 돌아왔을 때 환자가 살아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어요.

전투가 며칠씩 계속되어 부상 환자가 대규모로 밀려들 때는 도시가 더 위험한 시기였어요. 그럴 때는 현지인 직원들이 병원으로 출근하려고 집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어요.  그러면 국경없는의사회 국제 활동가 인력과, 병원에서 숙식하는 소수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직원들만 데리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일이 가장 많이 필요할 때인데 오히려 일손이 가장 부족했던 거죠.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서 팀의 안전을 책임지셨는데, 어떻게 해나가셨습니까? 

다른 활동지에서보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어요. 상황이 정말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죠. 무장한 남자들이 병원에 들어와 있었고 환자들도 무장한 데다 가족과 방문객도 — 이 사람들도 무장한 경우가 있었어요 — 늘 들락날락했어요. 병원 입구에서 무기를 내놓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티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어쨌거나 모든 사람의 몸을 수색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모두 겁에 질리고 의심에 차 있어서 더 어려운 상황이었죠.

수술 후 간호를 맡은 간호사 베키와 함께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했어요. “이 병원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러 오는 곳입니다. 병원 안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요. 우리는 환자들에게 수도 없이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병원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어요. 국경없는의사회는 소속 집단이나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해요. 환자와 가족들에게 이 원칙을 계속 설명해야 했어요. 그러느라 시간이 더 많이 걸렸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환자들이 매일같이 위협에 시달리고 병원 안에 무기가 있는데도 심각한 문제는 생기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존중하고 규칙에 따라주었어요. 하지만 밤에 병원을 비워야 해서 이튿날 환자들이 모두 무사할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었죠. 끔찍했어요.

병원 주변의 치안 문제도 병원 내부 못지않게 중요해요. 저는 국경없는의사회 현장 책임자 토머스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토머스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이를테면 총격적이나 무장 집단의 이동) 늘 알려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죠. 이를테면 심각한 사건이 터지거나 환자가 쏟아져 들어올 때면 토머스가 병원에 와서 질서 유지를 도왔어요. 병원 상황이 너무 위험해져서 팀 활동을 중단하거나 철수해야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머리를 맞대고 결정을 내렸어요. 혼자서 대처하려면 훨씬 힘들었을 거예요.

두려우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럼요. 무장한 사람들이 병원에 들어와 있으면 무서웠어요. 환자를 폭행하지 못하도록 중간에 서서  말려야 할 때도 있었어요. 공격을 하려던 사람들이 증오가 담긴 눈빛으로 저를 노려봤어요.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차로 이동하거나, 무시무시한 전투원과 마주치거나, 도로 위에서 시체를 봤을 때도 두려웠어요. 국경없는의사회 숙소에 있을 때에도, 옆에서 총격이 벌어지면 겁이 났어요. 거의 매일 밤 총격이 일어났지만, 유독 심한 날이 있었어요. 유탄이 숙소에 떨어진 적도 있어요.

책임자로서 우리 팀의 철수 여부를 늘 생각해야 했는데,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봐 두려웠어요. 이 사람들의 안전을 제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요. 

방기 코뮤나테르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떤 종류의 부상을 입었나요?

방기에서 온 환자들은 주로 20~35세 사이의 남자들이고 대부분 전투원이었어요. 반면에 방기 시 바깥에서 온 환자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들이었어요. 방화가 일어나거나 약탈을 당한 마을 출신들로,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나 다른 지역 국경없는의사회 팀이 방기 코뮤나테르 병원으로 이송한 사람들이죠.

현재 국경없는의사회가 코뮤나테르 병원에서 맡는 환자는 거의 전부 폭력 피해자들이에요. 총상과 수류탄으로 인한 부상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칼과 마체테로 입은 자상이 많아요. 다음으로는 집단 폭행과 감금, 고문 피해자들이고, 도망치다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어요. 부상의 종류는 늘 거의 같지만 수류탄으로 인한 부상자 수, 칼로 인한 부상자 수, 감금과 고문으로 인한 부상자 수는 그 당시에 일어나는 무력 충돌의 성격에 따라 달라져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습니까?

두개골에 외상을 입은 이드리스라는 환자가 있었는데, 얼굴이 산산조각 났죠. 진정을 시킬 수가 없어서 우리가 자리를 비울 때는 들것에 묶어둬야 했어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없을 때 진통제 놓는 법을 알려줬어요. 하지만 이드리스는 그날 밤 죽었어요.

또 한 사람은 꼿꼿이 선 채 걸어 들어왔는데 목에 자상을 입어서 기관이 뻥 뚫렸어요. 목덜미에도 마체테에 베인 상처가 있고 귀도 한쪽이 잘려나갔어요. 나흘 동안 고문을 당한 남자였죠. 그 남자도 이튿날 숨졌어요.

그리고 목과 가슴을 칼에 찔린 마이클도 있었어요. 팀 전체가 동원됐죠. 그를 안정시키고 수술팀이 멋지게 수술을 끝냈어요. 마이클은 기력을 되찾았고 마비되었던 팔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작은 승리였죠!

정형외과 천막에 있던 환자들은 종교가 다르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의 사람들이었지만, 치료를 받는 몇 주 동안 한 공간 안에서 차분하게 지냈어요. 밖에서는 적이었지만, 병원에서는 서로를 가로막은 장벽을 뛰어넘은 거예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현장 프로그램은 여태까지 해오신 국경없는의사회 프로그램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어떤 점이 더 힘들었습니까?

끊임없는 긴장과 분쟁의 복잡성 때문에 힘들었어요. 다른 현장 프로그램에서는 여기보다 상황이 분명했어요.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싸우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하지만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충돌이 공동체 간 분쟁으로 번져나가고 있어요. 지금은 누가 적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에요. 폭력이 증가하고, 정도가 심해지고, 사람들이 증오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이 모든 상황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어요. 상처와 부상도 끔찍했어요. 특히 칼에 찔린 상처가 무시무시했죠. 

업무량도 과중했어요.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온 적이 여러 번인데 대부분 중상을 입고 있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흔히 겪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방기에서는 경미한 부상에 비해 중상의 비율이 컸어요. 심지어 ‘정상적인’ 날조차 다른 곳보다 훨씬 심각했어요. 

방기 현장 프로그램은 제가 이제껏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힘든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아주 훌륭한 팀과 함께 일할 수 있었어요. 일터에서나 숙소에서나 단결력이 대단했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팀은 일도 무척 열심히 했지만, 열심히 일하고 숙소로 돌아간 밤에는 재니스 조플린의 음악을 듣는 것이 위안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