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
5인의 편지
2023년 전 세계를 누빈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들로부터 도착한 현장의 목소리들입니다.
01. 정상훈 활동가 | 의사
수단, 2022년 10월–2023년 3월
수단 옴두르만 근처 움바다 4개 진료소에서 주로 일했습니다. 대부분 아동환자였는데요. 응급 환자들 중에서는 폐렴 환자들이 가장 많아 열에 들뜬 채 숨을 헐떡거리고 갈비뼈 사이 살이 움푹움푹 들어가는 어린 아기들을 보면 ‘우리 진료소가 없었으면 이 아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한 순간들이었습니다. 폐렴과 함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역시 영양실조였습니다. 대체적으로 식량 상황도 불안정하고, 엄마들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면 모유가 원활하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요. 영양실조에 폐렴이나 말라리아가 동반되면 상태는 더욱 위험해집니다. 중간에 화장실 갈 시간, 휴식시간도 없을 만큼 진료시간은 바빴습니다. 아기와 엄마들이 몇 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진료가 모두 끝나고 운동장이 텅 비면 무척 홀가분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로서 그냥 두면 생명이 위험했을 영양실조나 폐렴에 걸린 아이들이 나중에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게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고요.
02. 강경애 활동가 | 약사
시에라리온, 2022년 10월–2023년 4월
수도 프리타운에서 서쪽으로 320km 떨어져 있는 케네마 지역 국경없는의사회 모성병동과 아웃리치 팀에서 약사로 활동했습니다. 교통편이 드물고 도로 사정이 열악해서 비가 오면 길이 끊겨버리는 지역으로 병원은커녕, 한국의 보건소와 유사한 형태인 지역 내 보건 거점을 방문하려면 6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 의료 소외계층이 많은 곳이기도 하죠. 아웃리치 팀은 외딴 지역 소외계층으로 하여금 예방·진단 및 치료를 위한 약품 공급과 의료서비스 접근성을 보다 쉽게 확보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전남 구례군 보건소를 통해 지리산 골짜기 곳곳에 있는 환자에게도 약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거랄까요.
약사로서 이런 팀에 합류하여, 외딴 지역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꼭 필요한 약국 내 의약품의 저장 상태, 재고 확보 및 의약품의 유효기간 등을 확인하고, 이것들이 환자들에게 제대로 투약되는지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고, 이와 관련하여 현지 직원을 교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외딴 지역 곳곳에 백신을 공급해 질병예방을 우선하는 일도 중요하므로, 백신의 유효성을 유지하여 수혜자들이 안전하게 접종을 받을 수 있게 ‘콜드체인 Cold Chain’이 끊기지 않도록 백신 저장 장치 온도 유지관리에도 만전을 기했습니다.
03. 이효민 활동가 | 마취과의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2023년 4월–5월
- 차드, 2023년 9월–10월
2015년 보상고아를 필두로 방기, 밤바리 등지에서 일해봤으니까 이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만 총 여섯 번 활동을 다녀온 셈인데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의료체계는 국경없는의사회 같은 외부 의료기관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국가 의료체계가 지역 의료서비스 공급을 거의 못하다시피하기 때문에 국경없는의사회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크죠. 현지 의료진에 양질의 교육 기회도 제공합니다. 제가 이번에 근무한 방기 소재 병원 마취 간호사들만 해도 국경없는의사회 지원과 교육을 받았고 이들이 다시 현지 의료 인력 양성에 큰 역할을 합니다.
차드에서 국경없는의사회 팀은 점차 확대되는 난민캠프들 내에서도 활동하고, 외곽지역 대상 이동진료소도 따로 운영합니다. 현지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규모가 커진 응급 대응 프로젝트이다 보니 국경없는의사회도 전세계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은 것이라 예전에 만난 적 있는 동료들을 여럿 다시 보게 된 점은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봄에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방기에서 일할 때 만난 방기 병원 수술실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적 간호사 2~3인이 이곳에 그대로 투입되어 있어서 이들을 다시 만났고, 작년 차드 모이살라에서 함께 일했던 콩고민주공화국 국적 소아과의와 프랑스 국적 조산사도 와 있었고요.
04. 홍기배 활동가 | 소아과의
에티오피아, 2022년 12월–2023년 8월
에티오피아 아파르 지역 듀브티 소재 종합 병원에서 일하고 왔습니다. 현장에 소아과의는 저 혼자였지만, 간호 활동 관리자를 포함한 다른 파견 활동가는 물론 많은 현지 동료들과 함께했습니다. 팀원들이 굉장히 좋았고 현지 의료진 교육 수준도 꽤 높아서 지금까지 다녀온 다른 근무지에 비해 배운 것도 많고, 전반적인 대화와 의견 조정 과정이 다 재밌었습니다.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영양실조 상태에 놓인 아동환자를 데리고 온 보호자들도 설득과 설명을 통해 치료를 진행하다가 상태가 호전되면 그간 방치, 방임하는 듯했던 모습이 싹 없어지고 다시 아동을 더욱 잘 돌보고 보살펴주려 합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의료서비스를 통해 어린이들이 더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발달이나 영양 측면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차원에서도 조력할 수 있었던 게 참 의미 있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직접 국경없는의사회 후원을 하고 있는 이유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 현장에 나가서 일해본 결과 실제로 이러한 활동에는 후원금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몸소 느꼈기 때문입니다.
05. 정현걸 활동가 | 의사
차드, 2023년 11월–2024년 1월
차드 아드레에 소재한 임시 난민캠프 지역 천막 병동에서 일했습니다. 소아 및 성인 외래 환자들을 보고, 소아의 경우 단기 입원 환자들도 진료했습니다. 현지인 의사 및 간호사들이 환자 진료를 하면서 제게 잘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제가 직접 진료도 하는 형태였죠. 아무래도 아랍어를 쓰는 환자들이 많으니 아랍어 통역이 있었고, 저는 현지 의료진들과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또한 국경없는의사회 직원들, 즉 타국 출신 활동가들과 현지 직원들의 건강 관리도 담당했고요.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는 찾아온 아동환자들 얼굴이나 몸에 파리들이 앉아 있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나서 진료실을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하지만 나중에는 좀더 익숙해졌고, 감정적 흔들림 없이 진료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다는 건 사실 막연하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현장에 가서 나와 같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고통에 공감해 본 것이죠. 동정심이 인도주의적 일을 하러 가는 동기의 일정 부분을 이룰 수 있습니다만, 이를 현장에서 실행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 이번 활동을 통해 직접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