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의사회의 인도주의에 기반을 둔 구호활동은 활동 지역 여성인권 상황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멘과 아프가니스탄 사례를 통해 그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2023년 가을 기준으로 예멘과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십 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한국 국민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돼 있는 상태다. 비교적 최근 발발한 또 다른 전 세계적 위기들로 인해 두 나라의 상황은 ‘잊혀진 위기’로 언급될 정도지만,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 규모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2022년 기준 국경없는의사회 예멘 프로그램 지출액은 1억 1천 5백만 유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4천 8백만 유로로 두 국가는 각각 연간 지출액 기준 1, 8위였다. 그만큼 해당 지역 인도적 위기가 심각하고 의료지원 수요가 크다는 반증이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주 외딴 지역 마을 임산부 및 소아 대상 보건소를 방문한 폐렴 아동 환자와 국경없는의사회 조산사 ©Nava Jamshidi
그러나 두 국가는 국경없는의사회에 점점 더 커다란 활동의 딜레마를 안기고 있기도 하다. 국경없는의사회 예멘 현장 책임자 에릭 우아네스(Eric Ouannes)는 2023년 5월 활동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은 고민을 공유한 바 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여성 차별을 용인하면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지속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서 활동한다는 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 원칙에 위배되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여성들의 실제적 활동이 계속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딜레마가 생기는 이유는 우선 두 나라가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매년 발표하는 성별 격차 보고서에서 번갈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현지 여성인권 관련 상황이 좋지 않다는 데 있다. 게다가 2022년부터 두 국가 집권 세력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여성인권 제약 조치들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2022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MSF
여성은 남성 친인척의 허가가 있어야 의료시설에 접근이 가능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의 가치와 권리가 적습니다. 한번은 한 여성이 제게 자기 아이를 팔고 싶다면서 ‘여자애로 뭘 하겠어요?’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애는 자라서 일을 할 수 있죠...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성인권 상황이 개선돼 적어도 제 딸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때로 다음 아이는 남자애가 되기를 기도하지만요.”_아프가니스탄 카불, 국경없는의사회 여성 직원
예멘
국경없는의사회가 예멘에서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86년이며, 2007년 이후로는 중단 없이 지속적 활동을 해왔다. 현재 13개 행정구역에 걸쳐 11개 병원에서 활동하고 16개 보건시설을 지원하며, 2022년 아동 영양실조 위기를 증언한 데 이어 2023년 상반기에는 급증한 홍역 환자 수에 적극 대응 중이다. 2023년 상반기 국경없는의사회 지원 의료시설을 찾은 홍역 환자는 2022년 연간 홍역 환자 수보다 이미 3배 많은 4천 명이었으나, 현지의 장기적 분쟁과 경제적 곤경을 고려하면 이 숫자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예멘의 후티 집권세력은 2022년 4월 ‘마흐람(Mahram)’ 관련 방침을 공표한 바 있다. 쉽게 말해 마흐람이라 불리는 남성 ‘보호자’ 혹은 그의 확실한 허가증명 없이 여성의 자유로운 이동은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의료지원이 필요한 환자가 남성 ‘보호자’ 없이는 병원으로 이동마저 불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방침은 국경없는의사회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미쳐 여성 직원의 역량강화 훈련이 취소되기도 하고, 여성 관련 질환 전문의의 채용이 어려워질 수 있다. 여자 의사를 원하는 가족, 남자 의료진을 꺼리는 환자에 의해 진료에도 지장이 생긴다. 더 나아가 국경없는의사회 직원 채용 및 근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이러한 여성 차별적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인도적 지원 활동에 종사하는 대부분 직원이 남자로만 이루어지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국경없는의사회 팀은 그러한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직면한 현지 인도적 위기를 무시하고 지원 프로그램을 종료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예멘에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2022년 아프가니스탄 헬만드주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소아과 병동을 찾아온 26세 부친 압둘라와 3살 딸 비비. 비비는 결핵과 빈혈 환자다. ©Oriane Zerah
아프가니스탄
국경없는의사회는 1980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종료된 2022년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진 긴급대응 활동을 논외로 해도 아프가니스탄 7개 주에서 인도적 의료지원을 계속했다. 그런데 2021년 8월 탈레반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 IEA)가 집권하면서 많은 국제 구호단체가 현장을 떠나고 외부 원조 재원은 갑자기 급감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취약했던 공공 보건 체계를 더욱 약화시켰고, 2022년 전반적 치안 상황이 약간 회복되었음에도 특히 여성의 이동 자유는 물론 교육과 취업 기회가 점점 제한됨에 따라 의료 접근성이 더욱 악화됐다. 국경없는의사회는 2023년 초 발간한 아프가니스탄 상황 주제 특별 보고서를 통해 마비 직전의 의료시스템과 만연한 빈곤에 더해 심각한 여성인권 탄압을 의료 접근성을 저해하는 3대 요소로 지적한 바 있다. IEA가 2022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여성 국내 및 국제 비정부기관 취업 금지 조치를 공표한 데 이어 2023년 4월에는 이의 적극 시행을 통보함에 따라 국경없는의사회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구성원 절반을 체계적으로 차별하는 국가는 결코 번성할 수 없으며, 규모와 상관없이 그 어떤 인도주의 단체도 여성 인력 없이 제 대로 된 구호활동을 펼칠 수는 없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공적인 삶의 모든 측면에서 조직적으로 여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는 이미 심각한 아프가니스탄 인도적 위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필수적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서비스 제공자 역시 모두 여성과 남성이 균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국경없는의사회 아프가니스탄 팀은 의료지원이 필요한 모두에게 이를 제공하며 팀을 현재 구성원들로 유지할 계획이지만, 당장의 여성 대상 의료 서비스 제공은 물론 차후 교육받은 여성 인력 확보 및 운용에도 차질이 생길까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