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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국경없는의사회의 시작
"국경없는의사회의 설립 이념은 단순합니다.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지금은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혁신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국경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로 이름을 정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 베르나르 쿠시네(Bernard Kouchner, 국경없는의사회 공동 설립자)
1968년 5월, 파리 혁명의 열기 속에서 우수한 젊은 의사들이 전쟁과 재난 지역의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가 돕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주도한 새로운 흐름의 인도주의는 긴급구호를 개념을 변화시켰고, 국경없는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 MSF)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흑백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68혁명을 접한 이래, 프랑스 국민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끔직한 장면을 접하게 됩니다. 세계 오지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보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나이지리아 남부의 비아프라 (Biafra)는 분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나이지리아 군이 이 작은 지역을 봉쇄하면서 비아프라 주민들은 기아로 생명을 잃어 갔고, 프랑스 적십자사는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호소하기에 이릅니다.
긴급 상황 속의 의사들
수년간 국제적십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ICRC)에서 의료 자원봉사 활동을 해 온 의사 막스 레카미에(Max Recamier)와 파스칼 그렐레티-보스비엘(Pascal Greletty-Bosviel)은 무력 분쟁이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정기적으로 응급 치료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적십자사는 결코 의료 단체가 아닙니다.
막스 레카미에는 말합니다.
“파스칼과 나는 적십자사가 아는 유일한 의사들이었습니다. 예멘에서 이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죠. 결국 적십자사는 우리에게 의사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지원자가 베르나르 쿠시네였습니다. 당시 그는 저보다 훨씬 젊었어요. 이제 막 공부를 마치고, 아직 논문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그는 비아프라로 가겠다고 선뜻 나섰습니다.”
그렇게 총 6명이 한 팀을 이루어 비아프라에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 활동 현장으로 가게 됩니다. 막스 레카미에, 베르나르 쿠시네, 그리고 임상의 2명, 간호사 2명이 동행했습니다. 유혈이 난무하는 교전 지역에 내던져진 경험은 풋내기 의사들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이들은 빈번하게 나이지리아 무장군의 과녁이 되던 병원에서 전쟁 부상자들을 수술해야 했습니다.
증언들
레카미에와 쿠시네는 주변을 봉쇄한 군인들 때문에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굶주리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세계가 이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나이지리아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동시에, 나이지리아 정부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적십자사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후 3년간, 다른 의사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비아프라인들(Biafrans)’로 알려진 이 의사들은 기존의 인도주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도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인도주의는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 고통 받는 이들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새로운 의학"
1971년, 의학 관련 잡지 토누스(Tonus) 소속 언론인이었던 레이몬드 보렐(Raymond Borel)과 필립 베르니에(Philippe Bernier)는 재난의 한가운데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 대재난의 여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료 단체를 설립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때, 자체적으로 긴급 의료 대응 단체를 구축하려 했던 ‘비아프라인들’이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베르나르 쿠시네는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야전 수술, 중증도 분류 의학, 공중보건, 교육 등, 새로운 형태의 의학과 그에 관련된 충분한 지식을 보장하고 싶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설립 이념은 단순합니다.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지금은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 정말 혁신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국경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로 이름을 정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먼저다
1971년 12월 22일, 국경없는의사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당시의 국경없는의사회는 의사, 간호사, 그 외 스태프 등 300명의 지원자로 구성된 단체였고, 그중에는 13명의 설립 의사와 언론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성별, 인종, 종교, 정치적 성향을 떠나 누구나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 그리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료 지원이 국경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첫 현장 활동
국경없는의사회 최초의 현장 임무는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Managua)에서의 구호 활동이었습니다. 마나과는 1972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만 명~3만 명이 사망한 지역이었습니다.
1974년, 온두라스에 몰아 닥친 허리케인 피피(Fifi)가 큰 홍수를 초래하며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후, 국경없는의사회는 현지인들을 돕기 위한 구호팀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75년, 처음으로 대규모 의료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폴 포트(Pol Pot) 독재정권의 압제에서 피난 온 캄보디아 난민들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첫 임무들을 수행하는 동안, 신설 인도주의 단체로서의 국경없는의사회의 약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준비, 의사들에 대한 미비한 지원, 게다가 의료 물품 공급망까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 조직인가? 소규모 게릴라 의사 단체인가?
“체계적인 조직을 원했던 구성원들과 소규모 게릴라 성격의 긴급 구호 의사 단체로 남기를 원했던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회장(1977년~1978년)을 역임했던 클로드 말뤼레(Claude Malhuret)가 내부 갈등에 대해 밝혔습니다.
“조직화 반대 측에 있던 사람들은 국경없는의사회가 적십자사와 같은 단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현재의 상황보다는 체계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물품 부족에 허덕이며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의사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79년, 국경없는의사회 연례 총회에서 마침내 내부 갈등이 분출되었습니다. 결국 국경없는의사회를 보다 체계적인 조직으로 만들 것인지, 게릴라 의사 단체로 남을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80퍼센트의 구성원이 조직화에 표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 쿠시네와 그를 지지하는 ’비아프라인들’은 이 결과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그들은 국경없는의사회를 떠나 "세계의 의사들(Medecines Du Monde)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국경없는의사회의 행보
이 시점부터 클로드 말뤼레와 로니 브라우만(Rony Brauman)이 지휘한 ‘현실주의’ 리더십이 국경없는의사회를 오늘날의 전문 단체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0년 이후, 국경없는의사회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 총 29개 사무소를 설치하고, 3만여 명의 직원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설립 이후, 국경없는의사회는 1억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해 왔습니다. 2014년 한 해 동안 실시한 외래 진료만도 830만 건에 달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또한 운영 및 재정의 독립성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시의적절한 구호를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 제공한다는 신념으로 국경없는의사회 자체 그리고 더 넓은 측면에서의 구호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