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활동 지역이 위험하지는 않는지, 어떤 안전 교육을 실시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국경없는의사회의 이재헌 활동가와 박지혜 활동가의 진솔한 현장토크를 만나보세요. (1편에 이어서)
Q. 구호현장에서 만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이재헌(이하 이). 워낙 많은 환자를 봐오셨겠지만 어떤 환자가 가장 기억에 남으셨나요?
박지혜(이하 박). 사진 속 이 친구가 저에게는 각별한 환자예요. 이 친구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장티푸스 때문에 장 천공이 생겨 병원에 왔는데 나이가 아홉 살인데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15kg밖에 되지 않았어요. 정말 말랐었어요. 사진 속 모습은 살이 많이 올랐을 땐데 그떄 당시에는 아홉 살짜리 아이 팔이 MUAC (Mid-Upper Arm Circumference, 팔 둘레를 기준으로 영양실조를 진단하는 도구)으로 해도 고위험군으로 나왔을 것 같아요. 마른 상태에서 배만 많이 부풀어있는 상태로 왔는데 첫 수술 당시 아이의 장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구멍 난 부분을 꿰매려 바늘을 대면 그 부분이 찢어질 정도라 아무도 살 거라고 예상을 못 했던 아이였어요. 계속 상처는 낫지 않고 상태는 안 좋아지니까 우리가 두 달 동안 배를 다섯 번이나 열었어요. 그리고 상처 부위에선 계속 고름이 나오고 우리는 사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살아남았어요. 다들 너무 놀랐고, 행복하고, 감격해서 아이를 안고 난리가 났었어요. 너무 고마운 아이라서. 저만 보면 서슴없이 안기고 사랑한다고 해주고 그래요. 너무 행복했었죠. ‘뽀뽀해’라고 하면 뽀뽀도 해주고 그렇게 친했던 아이인데 이 사진은 이 아이가 퇴원한 후에 정기검진 때문에 병원에 왔을 때 사진이에요. 오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또 얼싸 안았죠. 근데, 아이가 ‘I love you’라고 말하면서 저를 안아주는거에요. 그때 펑펑 울었어요. 그게 참 기억에 남아요.
이. 제가 가지고 온 사진도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을 주는 사진인데요. 아기 사진이에요. (요르단) 람사에서 찍은 사진이고요. 람사는 요르단에 있지만 바로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장소고 저의 첫 프로젝트 첫날 처음 인계받은 환자가 17살 소녀였어요. 동시에 산모였고 그리고 두 다리가 없었어요. 전쟁 때문에 집 근처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한쪽은 무릎 아래에서, 한쪽은 위에서 없어져 버렸죠. 다행히도 꿋꿋하게, 17살인데도 우리나라에선 17살이면 고등학교 1-2학년이고 한창 학우들과 놀고 진로에 대해서 꿈에 대해 기대에 부풀어 있고 또 고민도 하는 그런 나이인데 물론 조혼 풍습도 있었겠지만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고 다리도 잃은 게 안타까웠어요. 그래도 어느 날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가 너무 건강하게 태어난 거에요. 그래서 소녀도 고맙고 다행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전쟁 중에, 전쟁의 상흔이 많고 상처가 깊은 가운데도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 우리가 환자를 치료한 것도 있지만 환자를 치료함으로써 이렇게 또 다른 생명과 희망이 이어진다는 것을 느껴서 저에게는 첫 환자이면서 기억에 남는 환자, 정확하게는 환자의 아이가 되겠습니다.
Q. 구호 현장이 위험하지는 않나요?
이. 숙소 얘기로 다시 오는데 사실 아까 박지혜 활동가님께서 카메룬에 있을 때 숙소 밖으로 못 나갔다고 그러셨잖아요. 저도 아이티에 있을 때 한 발자국도 못 나갔거든요. 왜 그래야 했는지 그리고 숙소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사진으로 볼 수 있을까요?
박. 카메룬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어요. 2년째 되었는데 반군과 정부군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우고 있어요. 민간인 거주지에서도 계속 싸우고 마켓 앞에서 성당 앞에서도 싸우니까 모든 주민이 숲 속으로 피신을 가 있는 상태예요. 이제 거주지는 거의 텅텅 비어있어요. 그곳을 차를 타고 지나가면 ‘고스트 타운’이라고 하더라고요. 유령마을이라고 해서 아무도 살고 있지 않고 집들은 다 훼손되어 있어요. 집 곳곳에 검은색 스팟이 있는데 총알 자국이더라고요. 그런 곳이다 보니까 저희가 나가는 데 제한이 있어요. 국경없는의사회 숙소는 대부분 이렇게 철문으로 되어 있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벽 위에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그 가시철사(철조망)라고 하나요 다 둘러있어요. 그런데 저희 숙소 안에 있으면 보안을 담당해주는 직원분들이 있어서 그분들이 돌아가면서 24시간 내내 보초를 서 주세요. 저는 처음에 숙소를 봤을 때 ‘와 되게 안전하게 생겼다, 난 안전하겠다.’ 생각했는데 저희 엄마는 사진을 보시더니 ‘교도소에서 살고 있네?’ 이러시더라고요. 외부인이 볼 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견고하게 안전을 지키는 느낌이 있어서 저는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좀 다른 얘기인데 현장의 상황을 보여드릴 수 있는 사진입니다. 이거는 아이티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길거리인데요, 그냥 쓰레기들이 이렇게 널려 있어요. 이렇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 하나만 봐도 사회사업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반증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때 아이티의 경우는 정치적으로 너무 불안정했었고 어디 밖에 나가지 못해요. 현지인들도 강도 등의 사건이 너무 많고 하루에 평균 세 명 정도가 칼이나 송곳 같은 흉기에 찔려서 병원에 왔었고 (하루 평균) 두 명 정도는 총상으로 병원에 왔어요. 여기서 안전 수칙을 정말 철저하게 지켰어요. 병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었고 숙소에서도 숙소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갔었습니다. 전용 차량만 이용하고 대중교통은 안되는 등 안전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다녔습니다.
Q. 구호현장에서의 안전을 위한 대비책은?
박. 안전에 대한 교육을 저희가 정기적으로 계속 받아요. 예를 들어 총격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강도를 당했을 경우, 납치를 당했을 때 안전에 대한 대비도 많고 교육을 많이 하는 게 국경없는의사회의 실제 모습입니다.
Q. 구호 현장에서 가족과의 연락은 어떻게 하세요?
이. 이렇게 사진을 보니까 박지혜 활동가님 부모님 같은데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 한번 해주시겠어요?
박. 엄마가 이 사진 가져간다고 하니까 되게 싫어하셨어요. 예쁜 사진 가져가지 이런 사진 가져가느냐고. 이게 제가 라이베리아에 있을 때 새해 전날 부모님한테 전화했던 사진이에요. 그때가 (한국시각으로) 새벽 여섯 시 다섯 시 사이였는데 잠에 약간 취하신 상태로 제 전화를 받아서 두 분이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한국의 제 방으로 오신 거에요. 너무 귀엽더라고요. 그 모습이. 잠도 덜 깬 채로 좋아하시는 모습이 감사하면서도 되게 행복해서 캡처를 했는데 병원에서 일을 할 때나 숙소를 벗어난 공간에서는 네트워크가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상 이렇게 인터넷을 잡아가지고 사용을 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안 좋은 나라의 경우에는 인터넷이 숙소에서도 3~4일에 한 번씩 들어오기도 했었어요. 제가 또 바쁜 상황이면 인터넷이 되는 순간을 놓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부모님하고 연락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네트워크가 한국에서 사용할 때처럼 항상 원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락할 기회가 가끔이나마 있어서 저는 잘 사용했습니다.
이. 저 역시 한국에 있는 와이프와 카톡을 하고 지금처럼 인터넷 연결 상태가 좋을 때는 영상통화도 하고 그렇게 지냈죠. 진짜로 와이파이가 잘 안 잡히면 조금이라도 신호가 좋은 방으로 찾아가고 거기 쪼그리고 앉아서 마치 시티폰 있었을 때 전파 잡으려고 다녔던 것처럼. 감독님은 이해하시죠?
Q. 한국과는 다른 기후 때문에 겪은 어려움이 있나요?
박. 아무래도 한국과 아프리카의 기후는 많이 다르잖아요. 그것과 관련된 어려운 점도 있으셨나요?
이. 사실 저는 2년 반 정도 탄자니아에서 살다 보니까 더운 건 좀 익숙해졌어요. 저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고 더위는 덜 타요. 그래서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는 비교적 덜 힘들게 지냈었고요.
박. 사실 아프리카는 사계절이 있는 게 아니고 보통 건기와 우기로 나뉘잖아요. 해가 강렬하게 뜨거운 건기이거나 아니면 비가 왕창 내리는 우기가 왔다 갔다 하는데 건기를 지나서 우기가 오면 비가 폭포처럼 막 올 때가 있잖아요. 그리고 또 저희가 활동하는 지역은 흙길로 되어 있는데 그런 흙길에 비가 이렇게 내리면 땅이 정말 스펀지처럼 물렁물렁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출근하는 사진인데 완전히 오지탐험 하는 것처럼 발을 한 번 밟을 때마다 스펀지같이 쑥 들어가더라고요. 우기 때는 이런 길 걱정도 있지만 또 사실 말라리아나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들이 극성을 부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저희는 우기가 되면 더 많이 걱정하는 편이에요. 환자들이 더 많이 오는 경향이 있고요.
Q. 구호 현장에서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면?
이. 활동 지역이 이렇듯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요. 식사도 그렇고 가족과도 떨어지고 기후도 조금 다르고 안전 때문에 밖에도 못 나가고 사실 스트레스가 조금 쌓이기도 하잖아요. 그럴 땐 스트레스를 풀기도 해야되는데 그래서 저희는 하우스파티를 가끔 했었어요. 지금 사진을 보니까 같이 모여있는 모임 사진이 있네요.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박. 이 사진은 패밀리나잇이라고 해서 현장 가족들이 전부 의무적으로 모이는 날이었어요. 활동가들이 같은 숙소를 사용하니까 아무래도 모든 것을 같이하게 되기는 해요. 잠도 같이 자고 일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는데 그런 상황 안에서도 본인만의 스케줄이 있잖아요. 저의 경우에는 저녁을 6시 정도에 먹는 편인데 스페인 친구들은 저녁 식사를 9시나 10시쯤에 하더라고요. 사진에서처럼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을 타이밍이 사실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다 같이 모여서 먹는 날을 정해놨어요. 이날에는 7시에 모두가 모여서 밥을 먹는다고. 이런 날은 또 특별하게 본국의 요리를 해서 같이 파티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선생님은 한국 요리 많이 해보셨어요?
이. 한 번씩은 꼭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갔던 프로젝트에서도 일요일 저녁은 늘 같이 식사했어요. 요리 담당해주시는 현지 직원분들이 일요일에는 그분들도 쉬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일요일에는 요리가 나오지 않아서 한 사람씩 당번을 정해서 요리를 하는거예요. 적잖은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또 나름대로 재미있고 같이 도와주기도 해서 서로 도우면서 했어요.
이. 더 이야기 할 것들이 많지만 이 정도로 갈무리하겠습니다. 활동의 일면을 보셨지만 ‘할만하다’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준비가 되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준비를 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만약 저희의 영상을 보고 ‘해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가 어디를 참조해야 하죠?
박. 웹사이트를 먼저 참조해주시고 그 안에 보면 활동가 자격 요건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먼저 웹사이트를 보시고 그 안에서 질문이 있으면 저희 쪽으로 질문을 주셔도 됩니다.
이. 준비가 되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준비가 조금 덜 되어있더라도 크게 길게 보시고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희 영상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과 지지 부탁드립니다.
박,이: 그럼 우리 구호현장에서 만나요!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구호활동가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구호 활동에 함께해주세요. 여러분의 지원을 부탁합니다.
주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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