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사람들에게
유용한
자가관리
의료 시설에 가는 것이 어려운 지역의 여성이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국경없는의사회는 다양한 구호 현장에서 의료 서비스 접근이 힘든 여성을 위해 ‘자가관리(Self-care)’를 활용하고 있다.
말리 중부에서 일어난 분쟁을 피해 피난 온 마을에서 국경없는의사회 의료 시설을 방문한 소녀. ©Mohamed Dayfour/MSF
오늘날에도 전 세계 많은 여성이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받지 못한 채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성·생식 건강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생식가능연령의 여성 약 네 명 중 한 명이 임신을 계획하거나 제한하기 위한 피임제에 대한 접근성이 없으며, 전 세계 15세 이상의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은 여전히 많은 임산부의 사망 원인이 되고 있다.
여성의 의료 서비스 접근을 저해하는 여러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 장벽은 폭력과 차별로 인해 악화되며, 심각한 인도적 위기 가운데 더욱 심화되기도 한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의료 공백이 증폭되며 여성의 성·생식 건강에 큰 악영향을 미 쳤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각국에서 봉쇄가 시행됐지만, 이것이 가정에 머물고 있는 일부 여성에게는 위험 요소가 된 것이다. 의료 서비스에 접근하는 데 많은 장애물을 만나는 여성들은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데도 의료 시설을 방문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자가관리(Self-care)’이다.
자가관리란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에 있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하고, 건강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여성에게 자신의 건강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변화일 수 있는데, 이전에 이러한 자율성을 갖지 못하는 환경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구호 현장에서 이런 자가관리가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과 질을 개선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외딴 지역, 불안정한 상황이나 의료 인프라가 열악한 환경에서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이 나 진료소 등 의료 시설 밖이나 의사나 간호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의료 서비스를 확장할 수 있어 의료 자원이 부족한 환경에서 실용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 지원에 있어 환자 중심 접근 방식의 일환으로 이러한 자가관리 역량을 강화하고 있으며, 자가관리의 효과가 검증될수록 계속해서 새로운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자가관리는 지역사회 또는 개인의 가정에서 시행할 수 있는 위험도가 낮고 검증된 의료 서비스 옵션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한다. 자가투여 피임주사가 한 예다. 또한 자가 HIV 검사와 같이, 보다 편리하고 기밀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기 진단과 시기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가능하게 한다. 어떤 여성에게는 자가관리가 유일한 대안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전하지 않은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아예 치료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 대신 자가관리 임신중절약을 통해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 지역에서 ‘사야나프레스(Sayana Press)’라는 상표로 알려진 자가주입식 장기 피임주사를 도입했다. 이전부터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에서는 장기 피임주사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들은 의료진으로부터 스스로 주사를 투여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받은 다음 3개월마다 한 번에 최대 4개의 도구를 받아 가정에서 자가주사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최대 1년 동안 반복적으로 진료소를 방문하지 않아도 효과적인 피임이 가능하다. 사야나프레스는 실온에 보관할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해 피난을 떠나야 하는 분쟁지역의 여성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투리의 여성들에게는 이처럼 간편하고 사용이 편리한 도구가 큰 도움이 되었다. 2020년 한 해 동안 앙구무(Angumu), 니지(Nizi), 드로드로(Drodro)의 국경없는의사회 프로젝트에서 약 3,000회의 사야나프레스가 여성들에게 제공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 주에서 국경없는의사회 간호사 나오미 쿠곤자(Naomi Kugonza)가 한 여성에게 사야나프레스를 제공하며 가정에서 주사를 자가투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MSF
콩고민주공화국의 도사베 음반테게이스(38세)는 지역사회 상담가로, 국경없는의사회 보건증진 담당자와 함께 마시시(Masisi) 지역의 농촌 마을에서 효과적인 피임을 장려하며 가족계획을 위한 상담 또한 제공한다. ©Sara Creta/MSF
에스와티니는 전 세계에서 HIV 감염률이 가장 높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낙인과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여성에게 있어 스스로 감염 여부를 아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에스와티니 시셀웨니(Shiselweni) 지역에서 2017년 5월부터 경구용 HIV 자가검사를 지원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20분밖에 걸리지 않아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 가정에서 편안하게 검사를 해볼 수 있다. 고위험군에 속하는 경우 ‘노출 전 예방요법(PrEP)’을 사용하거나, 양성 반응이 나오는 경우에는 국경없는의사회 상담가가 대면 또는 유선을 통해 지원하여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로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고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에스와티니 시셀웨니(Shiselweni) 지역의 고정진료소에서 일하는 상담가. 국경없는의사회는 이 진료소에서 HIV와 결핵에 대한 예방 및 치료를 제공한다. 치료에는 자가관리 방식도 포함된다. ©MSF
에스와티니에서 국경없는의사회 보건증진팀의 일원이 지역사회 참여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MSF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서는 국경없는의사회가 중등증 및 중증 정신질환자와 폭력피해자를 위한 전문 정신건강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아동부터 성인까지, 그중에서도 가정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로 지역사회 내 이동이 제한되면서 나블루스의 여성들은 갑자기 집에 갇혀 나올 수가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성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지원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격 상담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치료사와 환자 모두에게 새로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스스로 변화하고 혁신하며, 그들의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여성들은 치료사와 함께 안전에 대한 계획을 만들어갔고, 상황이 진정되었을 때를 대비해 자가관리 체계를 마련했다. 폭력 가해자인 파트너가 상담 전화를 엿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한 암호어도 준비했다. 결과적으로 상담을 중단한 여성이 예전보다 감소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보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국경없는의사회가 진행한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 제고 세션에 참여한 여성들. ©Yuna Cho/MSF
이렇듯 자가관리를 활용한 접근 방식은 여성과 소녀에게 환자 중심적인 양질의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큰 잠재력이 있다. 특히 국경없는의사회가 활동하는 지역의 환경, 즉 긴급한 인도적 위기의 영향을 받거나 접근이 어려운 외딴 지역 등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자가관리는 반드시 정규 치료와 연계되어야 하지만, 의료 인프라와 인력이 부족한 환경과 공식적인 의료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한 채 치료를 필요로 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특히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보건 당국과 지역 단체,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자가관리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단단히 구축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과 소녀들이 스스로의 건강과 안녕을 돌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