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에서 국경없는의사회
직원이 되기까지
1975년 국경없는의사회를 만난
캄보디아 피난민 출신 부부의 이야기
1975년, 캄보디아의 여읏 여은(Yoeuth Yoeun)과 쩜로운 로(Chamroeun Ros)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이 캄보디아 내 소수민족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피난민이 되었다. 난민 캠프에서 만나 부부가 되고 국경없는의사회 직원이 되기까지, 이 부부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여읏 여은과 쩜로운 로 가족. ©Rafael Winer/MSF
남편 쩜로운 로와 나란히 앉아 과거를 회상하던 여읏 여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부는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캄보디아에서 피난해 태국 난민 캠프까지 가게 된 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1975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캄보디아를 장악했을 때 여읏은 고작 5살이었다. 이후 캄보디아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여읏은 가족과 떨어져 숲으로 도망친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폭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캄보디아를 탈출할 당시 상황은 정말 힘들었어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던 날도 많았고, 저는 체구가 작아 남들만큼 빨리 뛰지 못해서 무리에서 뒤쳐졌죠.” _여읏 여은
여읏은 겨우 캄보디아 국경과 인접한 태국의 난민 캠프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또다시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 난민이 캠프로 피난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캠프로 몰려왔고, 캠프에서 필요한 전문 인력이 충원되던 시기였다. 여읏이 17살이 되던 1987년, 카오 당(Khao Dang) 캠프의 국경없는의사회 소아병원에서 일하는 코살(Kosal)을 만났다. 여읏은 코살에게 병원에 직원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여읏은 일자리가 간절했다. 이후 여읏은 캠프 내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에서 국외 의료진과 함께 근무하며 해부학, 기본 의학, 조산학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국외 의료진은 현지 직원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을 우리에게 최대한 알려주려 했죠. 병원에는 임산부와 어린 산모가 많았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고됐지만, 동료들의 격려 덕분에 참 행복했어요.” _여읏 여은
여읏 여은과 쩜로운 로. ©Rafael Winer/MSF
비슷한 시기에 쩜로운도 여읏이 있던 캠프에 도착했다. 쩜로운은 198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프놈펜(Phnom Penh)으로 향했다. 이후 호주에 살던 형제가 태국으로 피난하라고 귀띔해주어 캠프로 가게 된 것이다.
“캠프까지 가는 데는 15일 정도 걸렸어요. 정식으로 등록된 난민이 아니라서 울타리를 넘고 여기저기 숨어 다니며 캠프까지 왔습니다.” _쩜로운 로
쩜로운은 보건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고, 국경없는의사회 약사 올리비에(Olivier)의 도움으로 약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올리비에 선생님이 제가 의료 분야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_쩜로운 로
여읏 여은과 쩜로운 로. ©Rafael Winer/MSF
그 무렵 같은 진료소에서 근무하던 여읏을 알게 됐고,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를 장악한 이후로 줄곧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했던 여읏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당시 여읏은 캄보디아로 돌아갈 계획에 집중하고 있었고, 1991년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를 떠나 프놈펜에 정착했다. 쩜로운은 캄보디아로 돌아온 후 지인들을 통해 여읏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연락이 닿은 여읏과 쩜로운은 이후 쭉 함께했다. 1994년 결혼식을 올린 부부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생겼고, 몇 년 후 쌍둥이 딸까지 얻었다. 1996년 여읏의 가족은 반떼이 민쩨이(Banteay Meanchey)에 정착했고, 부부는 다시 국경없는의사회에 합류해 성 매개 감염병 환자와 HIV/에이즈 환자 치료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 지역의 성매매 종사자를 돕는 데 집중했습니다. 진료소 검진일을 잡아주는 일도 도왔죠.” _여읏 여은
여읏과 쩜로운은 2000년대 초반까지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했고, 이후에도 계속 보건 분야에 종사했다. 30여 년 전 난민 캠프에서 받은 의료 교육은 부부가 스스로 독립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연로하신 어머니는 저를 도와줄 여력이 없으셨어요. 난민 캠프에 도착했을 때 저는 빈손이었는데, 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됐습니다. 그때 국경없는의사회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을 것입니다.” _쩜로운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