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주제보고] 특별 주제 - 일 년이 넘은 전쟁들

국경없는의사회 의사들이 전하는 이야기

국경없는의사회 의사들이 일 년이 넘은 전쟁들에 대해 전합니다. 

가자지구

잊혀선 안 될 현실의 기록

자비드 압델모네임Javid Abdelmoneim은 영국 출신 응급실 수단 의사이자 전 국경없는의사회 영국 회장입니다. 그는 2024년 6-7월 가자지구에서 의료 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자비드의 가자지구 체류 당시 일지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6월 6일 목요일

가자지구에서의 첫날 밤이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국경과 맞닿은 가자지구 해안가에 도착했다. 바다에선 군함이 해안선을 향해 발포하고, 하늘에선 드론과 헬리콥터, 전투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밤이 되면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집 창문이 수도 없이 덜컹거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룸메이트들을 살피는데, 정작 그들은 별 반응 없이 조용히 누워 잠만 잔다. 이렇듯 가자지구를 덮친 가혹한 현실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북부, 중부, 남부 등 가자지구 전역 주민들에게 닥친 현실이다.

6월 7일 금요일

운영이 재개된 가자지구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의 야전 치료실 내부. 2024년 6월. ©Javid Abdelmoneim/MSF

오늘은 최근 화상 및 외상 정형외과 병동 운영이 재개된 칸 유니스(Khan Younis)의 나세르 병원(Nasser Hospital)과 1차 보건의료 진료소 중 한곳을 방문했다. 5월 초 라파 Rafah에서 발생한 공격 이후, 국경없는의사회는 라파 인도네시아 야전 병원(Rafah Indonesian Field hospital)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했다. 우리는 이전에 이스라엘군에 포위된 적 있는 나세르 병원으로 다시 이동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가자지구 중부의 데이르 알 발라(Deir al Balah)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임시 텐트를 지나쳤다. 해안선에서 내륙까지 쭉 뻗어 있는 텐트들은 한 치의 여유 공간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인도적 지대(humanitarian zone)”로 지정된 그곳에는 약 백만 명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으로 내몰렸다. 1차 보건의료 센터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내리는 진단은 물과 위생에 관련되어 있다. 이는 설사, 피부 및 눈 감염 예방에 필요한 깨끗한 물과 화장실, 비누, 소독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6월 8일 토요일

이스라엘의 인질 구출 작전이 전개되면서 가자지구 중부에 있는 누세이라트(Nuseirat) 캠프에서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당 캠프에서 가장 가까운 의료시설은 국경없는의사회가 지원하는 알 아크사(Al Aqsa) 병원인데, 거기서 활동하는 의료팀은 이미 수많은 부상자로 과부하에 걸렸다. 알 아크사 의료팀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약 60명의 환자가 나세르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중 19명은 수술이 필요한 화상 및 정형외과적 외상을 입은 상태로 우리 병동에 들어왔다.

6월 9일 일요일

우린 아직도 어제 일로 휘청이고 있는데 더 많은 환자가 유입되면서 부담은 가중되기만 하고 있다. 구조된 사람보다 단지 부차적으로 희생된 사람의 비중이 더 높다는 사실은 인류의 수치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이는 이런 규모의 사상자 발생이 가자지구에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 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월 12일 수요일

자비드가 현장 방문 당시 촬영한 가자시 도로. 2024년 6월. ©Javid Abdelmoneim/MSF

오늘은 인도주의 구호를 위한 호송 차량을 타고 북쪽을 향해 가자시(Gaza City)로 이동한다. 전쟁 이전에 국경없는의사회는 가자지구 북부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폭격이 시작되고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지자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해당 지역을 떠났다. 이스라엘군은 군사 완충지대를 설치해 북부와 남부를 단절시켰다. 고립된 영토 속 또 다른 고립 영토가 생긴 꼴이다. 그 이후로 북부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인도적 지원으로부터 거의 단절되어 왔다. 놀랍게도 일부 국경없는의사회 동료들은 그곳에 남기로 했다. 진료소에 있던 동료들은 4월 이후 다른 국경없는의사회 직원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 이후 북부로 향하는 인도주의 구호를 위한 호송 차량 유입이 여섯 번이나 취소되거나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나를 만나자 반가워했다. 나는 의료 물자를 가져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호송 차량을 타고 남부로 향하기 전 그들과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떤 말로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진료소를 계속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료소에는 간호사 3명과 물리치료사 2명이 주 6일 근무하며 일주일에 평균 30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6월 13일 목요일

어제 목격한 일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해변에서 어부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호송 차량이 완충지대에 들어가기 전 대기 지점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떤 남자들이 얕은 바닷물에서 어망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
다. 그러다 갑자기 그들은 뛰기 시작했다. 무전기에서 군용 지프차 4대와 탱크가 접근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총알이 발사되면서 물과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고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남자 2명이 모래밭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
다. 그중 한 명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당국에 연락해 해당 남성들에게 응급 처치를 하거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차량에서 내릴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다른 어부들도 돌아왔다. 한 어부는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며 자신이 용기를 내어 직접 친구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개들이 시신을 먹은 뒤였다고 했다. 이스라엘 당국이 끝내 거절했던 우리 요청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어부들은 시신을 직접 수습하기로 했다. 그쯤에는 이미 두 번째 남성도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해변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재차 설명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시신이 호송 차량으로 옮겨졌을 때, 우리는 사망자를 확인하고 기록용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 남성은 목에 한 발, 다른 남성은 등 뒤에 한 발을 맞아 심장을 관통했다. 그중 한 명은 여전히 어망을 잡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완충지대 가장자리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굶주린 어부들을 죽여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6월 15일 토요일

가자지구 북부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에서 자비드와 동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24년 6월. ©Javid Abdelmoneim/MSF

내일은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 이슬람 최대 명절 중 하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동료 모두가 휴일에도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의료지원을 제공하고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되는 게 분명하다. 결국 그들은 인도주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인정한 집단학살일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고통에 잠식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일에 몰두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동료는 내게 “이번 이드에 희생되는 건 양이 아니라 우리일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글을 쓴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자지구에서 보낸 첫 주가 마무리되었고, 사람들에게 의료지원을 제공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여기서 목격한 것을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단

1년이 지난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은 희망

국경없는의사회 닥터 이브라힘

국경없는의사회 닥터 이브라힘. 2024년 6월. ©Ala Kheir/MSF

저는 지난 2년간 국경없는의사회 일반의로 활동한 닥터 이브라힘(Dr. Ibrahim, *가명)입니다. 저의 여정은 2022년 알 다마진(Al-Damazin) 병원의 영양실조 병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1년 후 전쟁이 시작되었고, 당시 저는 분쟁의 한가운데인 와드 마다니(Wad Madani)에 있었죠. 초반에는 카르툼(Khartoum)에서 와드 마다니로 이동하는 실향민들의 행렬을 뉴스를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는 캠프에 현장 진료소를 설치하고 가능한 모든 의료지원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향민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는 신체적 치료뿐만 아니라 심리적 지원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7개월 동안 우리는 캠프에서 영양실조, 홍역, 콜레라, 기타 전염병을 치료하고 정신건강 상담을 제공하는 등 지칠 줄 모르고 일했습니다. 분쟁이 격화되어 캠프를 떠나야 하는 순간 직전까지도 실향민들에게 생명줄이 되어주었죠.

우리는 필사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와드 마다니 병원에서 활동을 전개하려고 노력했지만 전력, 물, 안전한 환경 등의 부재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해당 도시에서 우리는 대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향민들이 와드 마다니로 향하는 여정은 매우 가슴 아픕니다. 일부는 수레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고 오기도 합니다. 대다수는 아무런 식량도 없이 5일을 걸어서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도착하고요. 질병은 만연했고 물자는 줄어들고 있었죠.

이동진료소는 환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매일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렸죠. 이렇듯 엄청난 압박에도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중증 환자부터 경증 환자까지 분류하고 상태가 심각한 환자는 병원으로 이송하고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환자는 현장에서 치료했습니다. 와드 마다니에서 공격 초기에 우리는 폭발음이 들려오는 상황을 무릅쓰고 병원에서 활동하는 팀을 도와 총상, 포탄 부상, 파편 부상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병원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지면서 환자들을 대피시키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죠. 무장 남성들이 우리를 심문하고, 숙소를 수색하고, 총으로 위협하며 차량을 탈취했습니다. 다음 날 우리 팀 중 일부는 다른 주로 대피했고, 나머지는 카르툼의 바샤이르 병원(Bashair Hospital)에 남아 계속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카르툼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지원 튀르키예 병원Turkish hospital. 2024년 5월. ©MSF

현재 가장 큰 난관은 의료 물자 부족입니다. 이제 수술 장비가 고갈되어서 물자가 도착하지 않으면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 처했죠.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위험을 감수하며 그곳에 남아 계속 돕기로 했습니다. 가족은 세나(Sennar)로 대피시켰고요. 총격과 위험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곳에 남기로 한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저는 신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지금 저는 총격과 폭격 소리가 들려오는 카르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4개월 동안 가족을 보지 못했어요. 가족은 이제 수단에 없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어요. 가족이 몹시 보고 싶지만, 내 나라와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저는 매일 제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와드 마다니 소재 캠프에서 온 한 어머니가 카르툼에서 저를 다시 보았을 때, 제가 그 캠프를 방문했던 닥터 이브라힘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제가 돌보던 한 장애 남성이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녀의 환했던 표정은 금방 다시 어두워졌죠. 전쟁 이전의 삶은 평범했어요.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돕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죠. 하지만 지금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가족은 이제 제 곁에 없죠. 두려움만이 가득합니다. 이렇듯 암울한 상황에서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날이 오면 우린 강제로 떠나야 하는 위협에서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고 발전하는 데 힘쓸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