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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남수단: "의대생 시절부터 꿈꿔온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가 되었습니다"

2022.03.25

이름: 김영웅
포지션: 외과의 (Surgeon) 
파견 국가: 남수단
활동 지역: 아곡
파견 기간: 2021년 10월 – 2021년 12월  

남수단 아곡의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앞에 서있는 김영웅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김영웅

1.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수단과 남수단의 국경이 맞닿은 아곡(Agok)의 병원에서 외과의(surgeon)로 지냈습니다. 총상 등의 외상 환자, 복막염 등의 응급 환자, 제왕절개가 필요한 산부인과 환자 등 병원 근처 지역에서 발생하는 각종 외과적 질환이 있는 환자분들을 진료하고 수술했습니다. 이곳의 의료팀은 저를 포함한 2명의 외과 의사, 1명의 마취과 의사, 2명의 소아과 의사와 여러 명의 현지 의료진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병원의 전체 입원 환자는 600여 명이었으며 하루에 수술이 10건 이상 있었고 응급 수술도 거의 매일 있었습니다. 

2. 주요 의료보건 문제는 무엇인가요? 

아곡 지역 근처에는 병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설이 없습니다. 의료진의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면 전부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으로 와야 합니다. 하지만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며칠에 걸쳐 걸어와야 하고, 최근에는 홍수 때문에 길이 끊겨 접근성이 더욱 안 좋아진 상황입니다. 

게다가 사건 및 사고가 많은 지역으로 환자의 양상이 한국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나라라면 조기에 진단하여 치료할 수 있는 충수돌기염 같은 질환도 이곳에선 심한 복막염으로 진행하여 환자의 상태가 위독해진 후 내원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출산 전 의료 시설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병원에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위해 급히 내원하게 되어 산모와 태아가 위험한 경우가 흔합니다. 

병원이 위치한 지역 특성상 총상을 포함한 외상 환자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원인은 다양하였습니다. 국가 간, 부족 간, 마을 간 분쟁뿐 아니라 이곳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재산인 소를 빼앗기 위해 서로 다투다 총상이나 자상을 입고 내원하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긴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마을에 여럿이었는데, 그들끼리 서로 싸워 심하게 다친 후 병원에 오는 경우 치료 중 보호자도 없을 뿐 아니라 퇴원 후 다시 돌아갈 곳이 없어 아주 안타까웠습니다. 

아곡은 환자가 많고 중증도가 높으며 의료 인력이 부족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지속적으로 현지 의료진을 고용하고 교육하여 지역 사회가 의료적으로 자립할 수 있길 희망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며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남수단 아곡 병원에 입원한 한 영아 환자의 손을 잡고 있는 김영웅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김영웅

남수단 아곡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의료진에게 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 ©국경없는의사회/김영웅

3.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환자들이 있나요? 

화상 환자로 병원 의료진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용감한 소녀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지역은 소아의 화상이 흔합니다. 일부다처제인 이곳에서 1명의 여성은 평균적으로 10명 내외의 아이를 출산할 뿐 아니라 여러 가사노동에 종사하게 되어, 아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스스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남수단의 움막 형태에 집에는 모닥불, 숯불, 화덕 등이 조리를 위해 마당마다 있는데 아이들은 그 주위를 뛰어놀다 불 위로 넘어지기도 하고, 더 어린아이들은 불에 겁 없이 다가가 손으로 만지기도 합니다.  

동생인 두 살 남자아이의 이름은 촐 촐, 누나인 다섯 살 여자아이의 이름은 아촐 촐입니다. 동생이 모닥불 속에 넘어지자, 누나는 주저 없이 불 한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동생을 구했습니다. 동생보다 누나의 화상이 더 심했습니다. 양손과 배, 등, 허벅지까지 전신에 깊은 화상을 입었습니다. 장기간의 입원 및 수십 차례의 외과적 처치가 필요했고, 제가 환부를 열고 드레싱을 진행할 때마다 매우 힘들고 아팠을 텐데도 용감하게 잘 버텨주었습니다. 몇 번의 피부 이식 수술도 진행했는데 다행히 결과가 좋아 잘 회복 후 퇴원하였습니다. 

동생인 촐 촐은 누나보다 한 달 전 퇴원했습니다. 입원 내내 아촐 촐은 까만 아기 인형을 안고 있었지요. 의료진을 항상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던 아촐 촐, 대견하고 멋지고 용감한 그녀. 응급실이나 수술실에서 환자를 잃어 마음이 흔들리던 날이면 아촐 촐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영웅 활동가와 아촐 촐의 모습 ©국경없는의사회/김영웅

소를 지키다가 손에 총을 맞은 9살 남자아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소가 가장 큰 재산이고 화폐 대신 통용되는 재화여서 서로의 소를 강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보통 어른들이 낮에 다른 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소를 지켜보는 일을 맡게 되는데, 그때 다른 부족에서 총을 들고 습격했습니다. 

소년은 가족을 대표해 가족의 전 재산인 소 몇 마리를 지키다 다쳤습니다. 두 팔 벌려 그들의 총구를 막으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총알은 손을 뚫고 지나가며 뼈를 부러뜨렸고 피부와 근육을 찢었습니다. 응급 수술을 시행하여 파편을 제거하고 여러 조직들을 최대한 복원하려 시도했으나, 엄지손가락은 끝내 살리지 못했습니다. 처음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부터 수술 이후의 치료 과정 내내, 소년은 신음 한번 내지 않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았습니다. 응석을 부려도 될 나이인데. 이곳의 아이들이 환경에 의해 너무 일찍 철이 드는 건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아곡에서 소 한 마리의 가격은 20만원입니다. 

4. 한국의 근무 환경과 비교해 다른 점, 그로 인해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남수단에는 중증 환자에게 사용할 수 있는 혈액이 매우 부족합니다. ‘헌혈하면 수명이 줄어든다.’ ‘수혈하면 상대방의 혈액 속 유전자가 들어와서 몸이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등등의 미신 때문에 사람들이 병원에 와 치료받기를 꺼리고, 입원 후 치료 중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 전통 의식을 받기도 합니다. 수술을 하기 전에 헌혈을 해줄 보호자부터 찾고, 적합한 혈액형을 찾아 수혈을 진행하는 절차가 정말 오래 걸립니다. 시간을 줄이고 절차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만, 단기간에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습니다. 특히 외과 의사의 입장에서, 우리나라라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환자를 현장의 여러 한계로 인하여 잃었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경없는의사회에 흉부외과 포지션이 따로 없어 외과의로 파견을 왔고, 제가 도착한 지역 일대에 외과 관련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은 저희 병원뿐이었습니다. 제가 치료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악화될 환자들이었기에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을 수술해야만 했습니다. 아곡의 상황을 출국 전 브리핑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에 외과 및 산부인과, 정형외과와 성형외과를 포함한 여러 과의 기본 술기를 익히고 떠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하루 일과를 알려주세요. 

병원 구획 안의 숙소에 거주하기에 출근과 퇴근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아침 8시부터 현지 의료진과 모여 회의 후 입원 환자들을 회진합니다. 이후 수술실에서 적게는 10건에서 많게는 16건의 수술을 합니다. 정규 근무 시간은 오후 5시까지이나 수술이 늦게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고, 입원한 중환자들의 상태를 밤늦도록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응급실은 24시간 운영되고 새벽에도 제왕절개를 포함한 여러 응급 수술이 생깁니다.  

간혹 찾아오는, 온전히 쉴 수 있는 일요일 오후에는 국제 구호활동가 25명 정도가 같이 거주하는 숙소의 식당에 모여 요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 이탈리아 활동가가 만들어주었던 파스타가 기억에 남는데, 확실히 맛이 다르더군요. 저는 동료들 사이에서 당시 인기가 좋았던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달고나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남수단 아곡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의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국경없는의사회/김영웅

6. 구호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와 과정은 무엇인가요? 

의대생 시절 읽었던 책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2005년에 '국경없는의사회'라는 책을 읽고 단체에 관심을 가진 후 2007년에 다른 저자의 '국경없는의사회' 책을 읽고 언젠간 현장에 가리라 결심했습니다(두 책의 제목은 같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설립 이념부터 활동 영역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엔 학생이었기에 지원할 수가 없었고, 대학 졸업 이후 공중보건의로 남극에서 복무 중 국경없는의사회의 지부가 한국에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벼르다 2012년에 장충동에서 개최된 국경없는의사회의 한국 첫 현장 활동 설명회에 참가했었습니다. 당시 설명회에 관한 공지는 지금도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 웹사이트 공지사항 게시판의 첫 글로 남아있습니다. 

설명회 이후 다시 한번 결심을 굳힌 후 구체적으로 진로를 설정했습니다. 외과의로 현장에서 제 손으로 직접 환자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외과'가 이름에 포함된 어느 과를 지원할지 고민하였는데 수련의 시절 흉부외과가 제일 재밌었기에 주저 없이 선택하였습니다. 이후 전문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치고 권역외상센터에서 일하며 현장 파견을 준비하였습니다. 사실상 10년 동안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일할 날을 꿈꾸며 커리어를 쌓았는데, "난 나중에 국경없는의사회의 하얀 티셔츠를 입고 말 거야."라고 친구들에게 말하며 긴 시간을 견뎠습니다.  

7. 첫 활동을 끝낸 소감은? 

기쁘고 아쉽습니다.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과 남수단 중간 어디쯤에 제가 머물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 환자를 도울 수 있었다는 성취감이 현장의 현실에서 느꼈던 좌절감, 동료와 환자들과 헤어졌다는 상실감과 뒤섞여 한동안 제 마음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랜 기간 목표했던 첫 활동을 마쳤기에 다음 목표로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이곳의 환자들에게 국경없는의사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오르막길을 오를 때 뒤에서 살짝 밀어주는 사람. 

9. 미래의 활동가에게 한마디 

현장에 가기 위한 거창한 이유가 없어도 됩니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번 해보고 싶으시면 지원하시길 권유합니다. 현장에서 다양한 국가의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그들이 제게 말해준 현장 활동 이유는 제각각이었습니다. ‘사는 게 지루해서 왔다.’ ‘휴가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서 왔다.’ ‘경력을 쌓아 국제기구에 가려고 왔다.’ '활동가가 직업이다.' 등등. 다른 사람을 돕고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는 것 아닐까요? 또한 낯선 곳에서 낯선 경험을 하면 평소에는 몰랐던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도 있고,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친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티셔츠도 편합니다. 

 

남수단 아곡의 노을을 국경없는의사회 동료와 활동가가 바라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김영웅

10.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요? 

귀국 후 국내의 3차 병원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흉부외과 전문의의 수가 충분하지 않고 진료가 필요한 환자가 우리나라에도 많습니다. 어디서든 제가 치료하는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언젠가 현장에 돌아가고 싶으나 아직 계획은 미정입니다. 다시 가기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