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나와있는 국경없는리포터입니다!"
오늘 국경없는리포터는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가 있는 서울에 조금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바로 전 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동료들을 대표하는 국경없는의사회 국제회장, 크리스토스 크리스토우인데요.
2024년 1월 국경없는의사회 지중해 수색구조선 지오배런츠호에 승선한 크리스토스 크리스토우 ©Mohamad Cheblak/MSF
크리스토스 크리스토우 박사(Dr. Christos Christou)는 누구? |
2019년 9월 국경없는의사회 국제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처음 국경없는의사회에 합류한 것은 2002년으로, 고국인 그리스에서 이주민과 난민들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국경없는의사회 첫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2004-2005년에 잠비아 HIV/AIDS 프로젝트에 의사로서 참여했고, 이후 수년간 외과의로 훈련받은 후 2013년부터 남수단, 이라크, 카메룬 등 분쟁 지역 국경없는의사회 프로젝트들에서 일했습니다. 그리스 중부의 작은 마을 트리칼라에서 태어난 크리스토우는 테살로니키 소재 아리스토텔레스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소재 카포데스트리아스 대학교에서 외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아테네 대학교에서 의료보건위기 관련 국제보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해당 대학 교직원이기도 합니다. 아테네 에반젤리모스 병원 외과수술·이식 부서에서 일반 및 응급 수술을 전공했습니다. 2013년에 런던으로 이주해 킹스칼리지 병원 결장수술 분야 시니어 클리니컬 펠로우를 역임하고 2018년 노스미들섹스 대학교 결장 및 응급 수술 컨설턴트가 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대장직장외과 유럽 이사회 펠로우로 임명되었으며, 국경없는의사회 그리스에서 사무총장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부회장, 2019년 6월에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2022년 6월에 국경없는의사회 국제회장으로 두 번째 선출되어 2025년 9월까지 해당 임무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
짧고 굵은 방한 기간 동안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과 관련된 당국 관계자들과의 만남은 물론 언론과의 인터뷰, 학생들과의 대화 등 눈코뜰새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떠난 크리스토우 국제회장.
2025년 3월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에서 강연 중인 크리스토우 ©MSF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여러분 앞으로 띄워두고 간 편지를 통해 만나보실까요?
존경하는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여러분,
저는 올해 3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 개소한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 동료들과 함께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분들 및 각계 인사를 만나뵙고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5년 3월 국회를 방문해 우원식 국회의장 등 국회의원들을 만난 크리스토우 ©MSF
아마도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이지만, 한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비상임이사국을 맡고 있으며, 중요한 백신과 진단기기 연구와 제작을 포함한 생명·의료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들을 보유한, 명실공히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만큼 국경없는의사회의 주요 활동 지역인 전 세계 70개국 이상의 어려운 현장에서 인도적 지원과 국제보건 관련 한국이 참여하거나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큽니다. 한국에 계신 여러분들께서도 여러가지 계기로 인해 세계 무대에서 한국이 가지는 영향력을 실감하신 일이 꽤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국경없는의사회와 함께해주고 계신 여러분들이라면, 지금 이곳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곳에서 생명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여러분,
저는 2002년에 제가 국경없는의사회에 처음 합류하기 전에 그리스의 원형극장에서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포스터의 내용을 아직 기억합니다. 그 포스터에는 총알과 의약품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죠. “그들의 무기는 살인을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생명을 구합니다”라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포스터를 보고 나서 “아 나도 보다 소외된 지역으로 가서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고 이에 따라 국경없는의사회 일원이 됐습니다.
저는 그리스의 작은 마을 출신이라, 시리아나 이라크 등 다양한 지역에서 피란해 온 이주민들이 그리스 작은 섬들에 도착해 필수적인 국경없는의사회 지원을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 왔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지원을 제공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 3년이 넘게 격화된 상태로 지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들은 유럽에서 비교적 환영받는 것을 지켜보긴 헀지만요. 안타깝게도 일종의 '이중잣대'가 작용하는 상황을 본 것이죠.
2022년 3월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 메디카(Medyka)로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들 ©Paweł Banaszczyk/MSF
존경하는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여러분,
제가 국경없는의사회 국제회장으로 취임하고 최근까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해온 전 세계 위기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초 휴전에 돌입했던 가자지구 전쟁과, 올 2월로 분쟁 격화 후에도 3년이 더 지나버린 우크라이나처럼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고 세계 각지의 후원자 여러분께서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곳들이 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물론 그런 긴박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활동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사람들이 많이 말하지 않는 ‘잊혀진 위기들' 속에서도 활동해 왔습니다. 예멘처럼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해도 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필수적 의료 접근성을 잃고 살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아이티처럼 정치적 혼란에 빠져 모든 일이 총으로 이루어지지만 정작 주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2025년 2월 예멘 아브스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입원치료식센터에서 6개월령 아기를 돌보는 국경없는의사회 간호사 ©Majdi Al Adani/MSF
또다른 한 예는 수단입니다. 저는 수단의 위기는 잊혀졌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무시받는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04년경에도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는 제노사이드(genocide)가 진행중이었는데 지난 해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비슷한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관련글 읽어보기). 저는 최근 다시 다르푸르를 방문해서 어느 무장단체에 약탈당한 병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무장단체는 임신중인 여성이 수술받는 수술실에 있던 산소통을 포함해 모든 의료장비를 약탈하고 끝내는 병원을 불태웠다고 하더군요.
수단은 국경없는의사회가 하는 일들 중에서 긴급한 의료 수요에 대응하는 것뿐 아니라 세상의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한 가지 예이기도 합니다. 2023년 4월 이후 2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전쟁 당사자들은 국제인도법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의료시설을 직접 공격합니다.
2024년 4월 수단 중부 다르푸르 소재 잘링게이 수련병원 창문을 관통한 총탄의 흔적 ©Juan Carlos Tomasi/MSF
그러면 국경없는의사회가 왜 이런 위기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를 증폭하려 노력하고 있을까요?
존경하는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여러분,
국경없는의사회는 국제 구호 의료 단체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1971년 한 무리의 의사와 기자들이 창립했습니다. 우리는 태생부터 의료 활동만큼이나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 즉 증언 활동을 주요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프랑스어로 테모아나지(témoignage) 라고 하죠. 이 활동을 위해 우리가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중립’과 ‘공정’의 가치입니다. 분쟁의 상황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다만 가장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2023년 2월 예멘 방문 당시 크리스토우 ©Majd Aljunaid/MSF
그러한 목표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디서 무슨 활동을 할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중요한 것이 ‘독립성’이라는 가치입니다. 창립 이후 지난 54년간 국경없는의사회는 이제 전 세계 7백만 명이 넘는 후원자분들 덕분에 재정적 독립성을 지켜왔습니다. 후원은 현장의 의료진과 연결된 사슬과도 같습니다. 이 사슬에 참여하는 모든 부분이 동등하게 중요하죠. 그리스인으로서 저는 17여년전 그리스에서 재정 위기가 시작된 이후 은퇴한 고령의 후원자분들께서 제게 써 보내신 편지들의 내용을 기억합니다. “올해는 기부를 많이 못해서 미안하다, 그나마 남은 여윳돈으로는 손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씌여진 편지들이었죠. 그래서 저는 답장을 썼습니다. “괜찮습니다. 단지 1유로를 후원하시더라도 그 연대의 마음이 가지는 가치는 같습니다. 손주분들께 제 감사의 마음도 전해주세요”라고요.
이것이 국경없는의사회가 지향하는 ‘북극성’과도 같은 가치들이고, 우리는 이를 나침반 삼아 우리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로 직접 갑니다. 전 세계 70개국 이상의 지역에서 영양실조, 유행병, 자연 재해와 인적 재해 - 즉 분쟁 - 에 대응하여 활동을 전개합니다.
2022년 남수단 루브코나 소재 마을 홍수 방지를 위한 제방 위에 서 있는 아동들 ©Peter Caton
존경하는 한국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지자 여러분,
이러한 가치들에 기반해 지난 54년간 국경없는의사회는 지지자분들과 정직하고 투명하게 소통해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에 후원자분들을 대상으로 번지르르하게 눈속임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연대하는 것의 가치를 믿을 뿐입니다.
분쟁지역이나 의료사각지대에 놓여 필수 의약품에 접근하지 못하고 기초적 의료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다가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매일을 살고 있는 눈앞의 현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대체 왜 우리가 신경을 쓰는 걸까요? 각자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한국에 계신 여러분들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을 거라고 저는 감히 짐작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과 한국 국민들께는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중반에 직접 겪으신 비극적 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물론 세계 무대에서 지금 한국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입증하듯이, 이러한 전쟁의 상처를 훌륭한 회복 탄력성으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해오셨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분명 이렇게 직접 겪어온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불행히도 지금까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 사람들의 상황에 진심으로 더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이제 한국이 명실상부한 강대국이 됨에 따라 그 시민들 역시 더 큰 세계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새로운 세대들과 교감하고 국경없는의사회가 하는 일을 더 잘 소개하려고 노력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국경없는의사회 동료들처럼 지구 반대편 험지에 직접 가서 일하실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지금 사무실에서 본인이 하고 계신 일을 통해서도 연대는 가능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연대라는 가치를 계속해서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남고, 또한 생명을 살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3년 12월 시리아 북동부 소재 알홀 캠프 내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클리닉 벽에 그림을 그리는 십대 청소년 ©Azad Mourad/M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