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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으로 바그다드를 떠난 외과의의 여정

2024.01.10

2003년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삶을 재건해온 닥터 라쉬드 파크리(Dr. Rasheed Fakhri)

수술실에 있는 라쉬드 파크리의 모습. 2017년 4월. ©Tom Barnes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소중한 조국 이라크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의 여파로 라쉬드 파크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는 이 불확실한 길이 고향의 익숙한 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17년 가까이 이라크 동향인들을 지원하는 여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라크 전쟁 후 찾아온 혼란 속에서 헌신과 온정으로 사람들의 삶을 재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라쉬드 파크리가 국경없는의사회와 함께한 낯선 여정 이야기를 전한다.

치유 여정의 시작

내가 국경없는의사회와의 여정을 시작한 것은 2006년이지만, 이라크를 지원하기 위한 국경없는의사회의 헌신은 이라크-이란 전쟁 이후 지원을 확대했던 1988년과 걸프전쟁이 진행되던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이라크에서 보다 중요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 계기는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이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은 광범위한 폭력 및 파괴, 자국 내 강제 이주로 점철된 격동의 시대를 불러왔으며, 이러한 상황은 향후 20년 동안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발생했다. 다른 많은 이라크인들이 그랬듯이, 나도 안전을 찾아 이라크를 떠나야 했다.

2003년에 바그다드(Baghdad)에 파견된 국경없는의사회 의료팀을 지원하기 위해 요르단(Jordan)에서 프로그램 매니저로 활동했던 나의 동료 마리 헬렌 주브(Marie-Helen Jouve)는 이라크에서 처음 활동한 이후 19년 만에 다시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목격했던 첫 번째 공습에 따른 엄청난 혼란을 떠올렸다.

우리는 완전한 혼란을 느꼈어요.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의 심각성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꼼짝도 못했어요.”_마리 헬렌 주브

바그다드에 있던 그녀의 팀은 그곳에 계속 머물기로 다같이 결정하고, 전쟁 부상자들을 돕고 전쟁이 전개되는 모습을 증언하기로 했다.

치안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2005년 말, 아내가 첫째 딸을 낳은 이후, 이라크에 머무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해졌다. 나와 같은 전문의료인은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인도주의 구호 활동가조차 예외가 아니었고, 이로 인해 국경없는의사회는 이미 2004년에 이라크를 떠난 상황이었다. 언제 재회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요르단으로 옮겨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만(Amman)에서 새로 시작된 국경없는의사회 프로젝트에 외과의로 합류했다.

암만의 국경없는의사회 지원 재건 수술 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라쉬드 파크리. 2008년 5월. ©Philippe Conti

치유의 손길이 시작되다

2006년 8월, 우리는 첫 이라크인 환자를 받았다. 환각 상태에 있던 그는 국경없는의사회를 보며 “프랑스인들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외쳤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이라크 환자들은 나에게 고국의 향기를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환자들은 이라크 의사조합(Iraqi Doctors Syndicate)의 도움으로 바스라(Basra) 및 모술(Mosul), 나자프(Najaf)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서 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트라우마가 새겨져 있었다. 시력을 잃거나 화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부모를 잃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아이들도 있었다. 이라크 내 치안 불안이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우리가 암만에서 치료하는 부상의 심각성은 이라크 주민들이 견뎌야 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일부 사람들은 자동차 폭발 잔해를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스펀지와 와이어 조각이 몸속 깊숙이 박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부상의 유형을 보고 부상을 입힌 무기의 종류와 출처까지 식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2003년 전쟁 당시 국제법상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집속탄의 잔해로 다친 환자들을 치료했다. 순수한 아이들이 이런 잔해를 우연히 발견하고 장난감으로 착각해 삶을 영원히 바꿔버리는 상처를 입곤 했다.

이라크에서 분쟁이 격화되면서 더 많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유입되자, 이라크와 요르단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 국경없는의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외부 의사들이 힘을 합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전문 역량과 장비를 제공해 지원했다.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과 집단 노력의 필요성을 인지했다. 한편 국경없는의사회는 수많은 대내외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라크 병원을 원격으로 지원했다.

재회와 회복

4개월간의 긴 헤어짐 끝에 가족이 요르단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의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딸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마침내 딸을 내 품에 안았을 때 그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완전한 기쁨과 사랑이 느껴졌다. 병원에서는 마치 끝없는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술과 의료 업무를 병행했다. 아침에는 직원과 환자들을 지원하고 돌보기 바빴고, 정오가 되면 수술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녁에는 국경없는의사회 본부 직원들과 온라인으로 모여서 이야기, 교훈, 경험을 공유했다.

때때로 나는 환자들의 충격적인 건강 상태에 압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계속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직접 목격한 성공 사례들 덕분이었다. 팀원들 간의 공통된 목적의식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알리(Ali)와 같은 아이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알리는 모친과 함께 친척을 만나러 이동하던 중에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해당 사고로 인해 알리는 엄마와 다리를 잃었다. 알리가 병원에 도착한 것은 사고가 나고 2년 반이 지난 후였는데, 그는 아직도 신체적 및 정서적 충격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알리와 나는 둘 다 고통스러웠다. 알리는 부상의 고통을 느꼈고, 나는 어린 소년이 전쟁으로 두 다리를 잃은 것을 보면서 고통을 느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알리와 알리의 부친. 2008년 5월. ©Philippe Conti

몇 달간의 수술 및 재활 끝에 알리는 마침내 의족의 도움을 받아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알리의 여정은 우리가 애초에 의사가 된 본질적 이유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희망을 되살리고, 치유하고, 생존의 기적을 목격하는 것이다. 비록 의사로 일하면서 나 또한 무너질 때가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지만, 환자들을 위해 강인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시켰다.

국경없는, 한계도 없는

2009년, 이라크를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이라크를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비행기는 이라크 북부로 향하기 전 환승을 위해 바그다드에 착륙했다. 너무나도 가까운데 밖으로 나가서 나의 마을과 친척을 볼 수 없는 고통은 그 어떤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우리는 국경없는의사회가 2007년부터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는 쿠르디스탄(Kurdistan) 지역의 술라이마니야(Sulaymaniyah) 도시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라크의 불안정한 치안 상황 때문에 국경없는의사회는 병원 9곳을 원격으로 지원했고, 나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국경없는의사회의 치료는 신체적 치유를 뛰어넘는 범위였다. 포괄적인 지원의 일환으로 우리는 심리적 안정을 우선시했으며, 이는 직원들에게도 해당했다. 특히 환자들을 돌보면서 전쟁의 참화를 눈 앞에서 목격한 외과의의 심리적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제공하는 심리상담 세션에 이라크 아동들이 참여하고 있다. 2008년 5월. ©Philippe Conti

다양한 환자를 만나다

국경없는의사회와 여정을 함께한 지 4년이 지났을 무렵, 아랍의 봄이 중동 전역을 휩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환자들은 더 이상 이라크인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2011년 6월, 병원에서 첫 번째 시리아 환자를 받았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라크인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전쟁을 여러 번 겪으면서 고통과 슬픔에 익숙해 있었고, 때로는 놀랄 만큼 뛰어난 회복탄력성을 보여 날 놀라게 했다. 반면, 시리아 환자들의 현실은 끊임없는 충격이었다. 무차별적 폭격으로 오랜 평화가 깨진 상황이었다.

한 이라크 환자가 국경없는의사회 지원 재건 수술 병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암만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2006년 9월. ©Olivier Falhun

암만에서 이라크 환자들을 지원하고 돌보던 우리의 헌신은 추후 예멘을 비롯해 전쟁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의 환자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 당시 생존자 중 한 명인 리마르(Leemar)가 특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시리아 전쟁 중에 발생한 잔혹 행위로 심각한 부상과 트라우마를 겪은 그녀는 회복 과정에서 놀라운 진척을 보였다. 그런 회복력은 그녀가 낙관과 성공의 주창자가 되는 데 영감을 불어넣었다. 리마르는 새롭게 얻은 힘과 긍정적인 태도를 선보임으로써 다른 병원 환자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이슬람국가(IS)가 이라크에서 많은 지역을 장악했던 2014년부터 해당 지역을 다시 장악하기 위한 무장 전투가 끝난 2017년 사이에 이라크인들이 겪은 고통은 그때까지 내가 목격한 고통 중에서 가장 끔찍했다. 환자들이 분쟁 지역에서 병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전쟁이 야기할 수 있는 신체적 및 정신적 피해의 정도를 정확하게 목격했다. 전투는 대부분 지역에서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발생했으며, 거주 지역과 고립된 민간인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서도 벌어졌다.

더 나은 미래로

나는 항상 우리나라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우리는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2017년에는 맞춤형 보형물을 만들기 위해 3D 프린팅 기술을 도입해서 환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한 소년은 학교에서 더 이상 선생님한테 의존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연필을 깎게 되었다. 또 어떤 여성은 아름다운 수공예품 창작으로 예술을 통한 만족감과 수입을 얻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위기의 무게에 억눌려 침체되었던 이라크의 의료 분야는 회생이 절실하다. 이라크인들은 보건 체계가 활력을 되찾아 주민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나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제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 이라크로 돌아가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다. 조국과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 기여하려는 열망이 여전히 나의 원동력으로 남아 있으며, 암만 병원에서 동향인들인 이라크인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가능한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모든 환자들이 합당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헌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