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우즈닉은 집중치료 전문 간호사입니다.
검은 머리칼과 갈색 눈, 나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분주히 이 병실 저 병실을 돕니다. 사라는 6개월 전 미국 콜로라도의 덴버를 떠나 가자지구로 왔습니다.
“프로텍티브 엣지” 작전으로 그녀는 현장 근무 마지막 날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자지구에 머물면서 팀을 지원하고 국경없는의사회의 가자지구 의료 활동 유지를 돕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첫 현장 근무지가 가자지구여서 몹시 들떴었죠.
제 전공과도 잘 맞는 곳이고 실상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요. 가자지구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상황은 정말 모순적입니다. 기초적 물품은 턱없이 부족한데 반해 해변의 초호화 호텔처럼 예상도 못했던 것들은 또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나세르(Nasser)병원의 집중치료실에서 일하면서 장갑처럼 극히 기초적인 물품조차 부족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어요. 미국 같으면 배급을 해야 할 만큼 부족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기초적인 물품인데 말입니다.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함께 근무하던 팔레스타인 수간호사는 늘 이런 말을 되풀이했어요. “늘 물자부족에 시달리는 가자지구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하지만 가자는 그렇게 낙후된 지역이 아니거든요!
안전 문제 때문에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은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연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나세르 병원의 근무조건은 매우 열악합니다. 많은 스태프들이 수개월 간 월급을 아예 받지 못했거나 간헐적으로 일부만 받고 있어요. 하지만 이들은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일자리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약간이나마 월급을 받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리고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저는 수술 후 치료를 담당하는 진료소 운영을 돕고, 여러 병원에 기부할 응급 약품 재고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거의 매일 이동 진료소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물리치료사와 간호사와 입원 담당자 한 명씩으로 구성된 기본 팀을 꾸렸죠. 모두들 진료소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로만 만든 팀이었어요. 환자들이 걸어 다닐 필요가 없도록 국경없는의사회 차량으로 태워왔다 집으로 태워다 주는 일을 했습니다. 제 역할은 대개는 진료 활동 감독이지만, 폭격이 너무 심해서 이동 진료소를 열 수 없는 날에는 일부 환자들이 제가 있는 진료소까지 걸어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직접 붕대를 갈아주었어요. 어린 아이들에게 붕대를 감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자기에게 어떤 처치를 하는지 몰라 의아한 눈으로 의료진을 빤히 쳐다보니까요.
새로 들어오는 환자의 40퍼센트 가량이 5세 이하의 아이들입니다.
뜨거운 물에 허리 아래로 몽땅 화상을 입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기억납니다. 이런 화상은 흔하지만 이 아이의 화상은 폭격을 피해 뜨거운 물로 뛰어드는 바람에 생긴 겁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우는 아이를 달래던 부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그 후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불행히도 후속 치료를 받으러 돌아오지 못했거든요.
열 살에서 열 한 살가량 된 여자아이도 잊을 수 없어요. 집에서 뜨거운 차를 팔에 엎는 바람에 화상을 당한 아이였어요. 혼자서 진료소까지 왔죠. 국경없는의사회의 현장 코디네이터인 니콜라스(Nicolas)가 아이에게 “혼자서 길을 걸으면 무섭지 않니?”라고 묻자 “언젠간 모두 죽잖아요”라고 대답하더군요.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아이가 제 나이보다 너무 빨리 커버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자지구를 떠나기는 매우 힘들 것 같습니다.
이곳 사람들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위기가 끝난 후에도 사방의 벽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갇혀 사는 친구들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이들이 행복하기를, 무엇보다 자유와 선택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들을 가두는 벽만 없었더라면 누렸을 권리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