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경 두 번째 정규 수술을 시작하려 하는데, 캐비닛 철제 선반 위에 올려놓은 당직 폰이 초롱초롱한 시그널 음에 부르르 떠는 요란함을 범벅 하여 신호를 했다.
써지컬 스크럽(수술 준비를 위한 소독)을 하고 환자 앞에 서 있는 터라, 순회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전화기를 귀에 대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이, 재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지금 시간 돼?”
걸걸한 목소리의 속사포 같은 질문이 전화기를 귀에 대지 않아도 들릴 정도로 울렸다. 의료팀 리더(MTL, Medical Team Leader) 니키이다.
“하이, 니키. 지금은 수술 시작하려는 중이라, 12시쯤 어때?”
사무실로 와달라는 요청에, 시간이 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연락하고 사무실로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변하고 전화를 마쳤다. 수술은 예상대로 12시쯤 마치긴 했는데, 다음 환자가 벌써 옆 수술방에서 마취를 하고 있는 상태라 사무실까지 다녀올 시간은 없을 것 같다. 니키에게 전화를 걸고, 그녀의 답변을 받았다.
“알았어, 그럼 전화로 간략하게 이야기 할께. 주치의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 있어. 담당 환자 중 환자A와 환자B를 내일 퇴원하도록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해도 될까? 환자C와 D도 다른 병원으로 보낸다는 거 에드가(외과팀리더;SFP, Surgical Focal Point)와 이야기 된 거 맞지? 그 두 환자도 내일 중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외고정 장치(치료 중인 뼈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물)을 제거하거나 교체해서 퇴원 조치 해 줄 수 있어? 급성기는 지나서 퇴원이 불가능한 거는 아닌 거 맞지? 내일 퇴원해야 하니까, 꼭 내일 퇴원할 수 있도록 부탁해.”
응? 내일 다 퇴원 시킨다고? 적어도 1주는 더 여기 병원에서 치료하기로 한 환자들 아니던가? 지난 그랜드라운드(일요일 오전에 모든 팀원이 함께 전체 환자를 리뷰 하면서 개괄적인 한 주 계획은 세우는 회진)때의 치료 계획과는 사뭇 다른 지침이 내려오니 무슨 일인가 싶다. 그래도 상부의 다급하고 단호한 부탁이 내려왔으니 그 이유는 다음에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어떻게든 오늘 당장 서둘러서 모든 걸 준비하려니 골치가 아파진다.
3명은 개방성 골절의 상처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외고정 장치 제거하고 통기브스로 바꾸지 못할 상황은 아니지만, 1명은 지금 외고정 장치를 빼기에는 무리인데.. 게다가 오늘 가뜩이나 수술 일정이 많아서 정규 수술 다 끝나고, 이어서 4명의 환자를 더하려면 인력이나 물품이 가능하려나?
일단 할 수 있는데 까지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수술실 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응급수술도 아닌데 내일 정규 일정으로 하면 안되냐며 입을 불쑥 내미는 팀원도 있지만, 그래도 다들 지시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준비하기로 했다. 추가 근무를 할 인력이 편성되고, 물품 준비가 진행되었다.
결국 늦은 저녁 4명의 환자가 내일 퇴원할 수 있는 조치를 마쳤다. 마지막 한 명은 궁리를 해봤지만 외고정 장치를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니키와 상의 후 그냥 외고정 장치를 달고 시리아로 보내기로 했다. (요즘 재고가 점점 부족해지고 있어서, 물자 절약 모드로 들어갔다. 다음 물품 조달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환자의 외고정 장치 중 인체 내로 삽입되지 않아서, 재활용이 가능한 부분은 최대한 재활용하고 있다. 퇴원 조치 할 경우는, 특히 환자가 다시 시리아로 가는 경우에는, 재활용 가능 부품이 수거가 안 되므로, 외고정 장치 제거가 가능하다 싶으면 제거해서 부품을 확보한 후 보내고 있다.)
다음날 아침이 되니, 회진을 시작하기 전 니키가 사무실로 부른다. 환자 명단을 앞에 주욱 펼쳐놓으며, 조금이라도 퇴원 가능한 환자가 누구누구인지 알려달라고 한다. 대체 이렇게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가 뭔가 싶어서 물어보니, 지금 상황이 명확하게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국경너머에서 정세가 불안정한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엊그제 엄포성 폭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시리아 남부의 정국이 어떻게 진행될 지가 아직 많이 모호한 상태여서 이에 대한 공식적 공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현재 모든 병상이 차 있기 때문에 대량사상자가 오면 감당할 수가 없으니 병상을 최대한 비우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8명의 환자 이름에 동그라미가 쳐졌다. 대부분 자타리 캠프로 보내질 것이다. 아직 재활 캠프로 보내기에는 조금은 이른 감이 있지만, 행여 그 쪽에서 감당이 안 되면 다시 데려오기로 하고, 우선 보내기로 했다. 오전 회진을 마치니, 동그라미 환자들에 대한 면담과 설명이 뒤따랐다. 환자들의 표정에 약간의 어리둥절함이 보이고, 약간의 서운함이 등뒤로 느껴진다.
병실을 비우기 시작한지 이틀이 지나니, 아급성기 병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 2병동의 환자 수가 반으로 줄었다. 10병상 병실에 침대가 모자라 두 어 개 더 끼워 넣어 북적이던 병실이 이제는 남청색 매트리스 비닐이 들어난 빈 침상이 더 많이 보인다. 낮이 되면 휠체어와 목발로 복도를 돌아다니고, 정문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끽연을 즐기는(여기는 흡연율이 높고, 식당이나 쇼핑몰 건물 안에서도 흔히 담배를 핀다. 병원 건물 내에서는 금연이 지켜지지만, 건물 밖 정문 앞에서 담배 피우는 풍경은 흔하다.) 환자들로 북적이던 병동이 한산하다. 아직까지는 언덕너머에서 별다른 소식은 없다. 앞으로도 별 소식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차하면 두 번째 긴급 후방 이송이 이루어 질 것에 대비하여 명단을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다. 람사의 비워져 가는 병원을 보고 있노라니, 고요해진 병동 복도를 지나고 있노라니, 어스름한 새벽 낮게 깔린 안개 같은 적막함이 서린 듯한 긴장감이 마음을 스친다. 오늘 저녁, 병동 정문을 나서며, No Weapon 마크가 유난히 더 눈에 들어온다.
웹툰 [보통남자, 국경너머 생명을 살리다]
이재헌 | 국경없는의사회 의사
정형외과 전문의로, 2016년 요르단과 아이티에서 국경없는의사회의 의료 구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전부터 국제 구호활동에 관심이 많아 탄자니아를 비롯해 네팔, 필리핀 등지에서 의료 지원 활동을 해왔다. 올해 요르단에서 시리아 전쟁으로 인해 외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겪고, 느낀 이야기들을 일기로 적었고, 그 일기는 김보통 작가의 웹툰으로 재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