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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을 기억하며

2014.04.10

올해 4월로 르완다 대학살이 20주년을 맞았습니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100일 동안 르완다에서는 약 80만 명이 학살 당했으며 그 중에는 국경없는의사회의 현지인 직원 100여 명도 있었습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현장 책임자로 일했던 레이첼 키델-먼로가 거의 20년만에 두 나라를 찾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르완다 대학살을 다시 기억하고, 이웃한 콩고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폭력과 절망적인 이야기들을 전하고자 합니다.

글 레이첼 키델 먼로(Rachel Kiddell-Monroe)

지난 달 저는 거의 20년 만에 르완다를 다시 찾았습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전후에 저는 그곳에서 국경없는의사회의 현장 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의 경험은 제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르완다에서 제 안의 순수함은 죽었습니다.

1994년 4월과 5월, 저는 르완다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콩고민주공화국 고마(Goma) 지역에서 폭력 사태를 피해 도망친 난민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포의 도가니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100일 동안 8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난도질 당한 시신으로 가득 찬 강물은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뇌물로 1달러를 쥐어주고 총살을 택한 몇몇 희생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신은 머리가 잘려나가고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르완다 소년 몇 명이 자기 마을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머니가 강간 당한 뒤에 살해 당하고, 누이들도 죽고,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수풀에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소년들은 며칠을 달리고 또 달려서 간신히 국경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한 소년은 한쪽 팔이 간신히 어깨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남동생이 그의 품 안에 안겨 죽었다고 했습니다.

20년만에 다시 찾은 르완다

거의 20년만에 르완다를 찾아갈 때 제 머릿속에 있던 것은 바로 그런 기억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르완다 수도 키갈리(Kigali)에 도착했을 때, 자동차와 상점들, 그리고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활기차고 풍요로운 아프리카 도시가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세상의 종말 같은 사건이 지나간 이후의 유령 마을, 총탄, 핏자국, 아무렇게나 구덩이를 파서 만든 공동 매장지, 죽음과 공포로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같은 기억들은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여겨졌습니다.

키갈리 북서쪽 루헨게리(Ruhengeri)에 있던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은 이제 다양한 일반 질병을 다루는 활기 넘치는 병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대학살 직후 며칠, 몇주 동안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을 찾아왔던 전쟁 부상자나 지뢰 피해자 등의 환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오로지 정신적 트라우마만이 이들이 겪었던 공포의 산증인으로서 끈질기게 이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박한 기념비와 공동 매장지 현장에서 이 작은 나라를 집어 삼켰던 거대악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타레(Butare)에 들러 1994년 4월과 5월 잔인하게 학살당한 국경없는의사회 르완다 현지 직원들을 추모했습니다. 병원 맞은 편, 부타레대학 부지에 공동 묘지가 있습니다. 망자의 사진이 담긴 소박한 기념비도 서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저는 소리 내어 울 수 있었습니다.

국경 너머에서 계속되고 있는 일상적인 폭력

국경을 넘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향했을 때 제가 마주한 풍경은 그야말로 극명하게 르완다의 차분함과 대비되는 광경이었습니다. 예전엔 작은 마을이던 고마(Goma)는 이제 키부 호수 변을 따라 뻗어나가 인구 100만 명의 도시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100여 개가 넘는 국제 인도주의 단체들의 지원 덕분에 지역 경기는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마 시를 벗어나자마자 이어지는 험한 도로를 따라가면 언덕과 도로변 여기저기 흩어진 피난민 캠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임시변통으로 지은 허술한 집들에는 수십 만 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 중 80%가 고마 북쪽 아름다운 산간 지역인 마시시(Masisi)에서 발생한 무력 분쟁 때문에 실향민이 된 사람들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마시시에 갔던 것은 1996년이었는데, 현재의 마시시는 제 기억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때는 분쟁이 막 시작된 참이었지만, 오늘의 마시시는 당시 사람들을 도망치게 만들었던 그 폭력에 완전히 젖어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경찰서 앞을 지나갈 때 안에서 구타를 당하는 남성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그의 고통과 분노의 비명소리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폭력과 실향, 박탈 말고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 세대의 콩고 아이들인 것입니다.

©MSF

치료를 받기 위한 투쟁

우리는 마시시 마을의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응급실에 한 아기가 꼼짝도 않은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중증 폐렴이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온 아기의 엄마는 마을에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다른 여섯 자녀와 아기를 데리고 숲으로 피신했는데 숲에서 지내는 동안 아기는 폐렴에 걸렸던 것입니다.

아기의 엄마는 1년 간 피난민 캠프에서 지내다가 최근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다시 시작되어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량도 피난처도 없고, 지독한 모기떼와 폭우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나흘 후에 이들은 숲에서 죽느니 차라리 집에서 죽겠다며 마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기의 병세가 점점 심해졌지만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가 약탈 당해 의약품을 도난 당했기 때문에 마을에 남은 약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기 엄마는 자녀들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마시시 병원까지 걸어오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다행히 도중에 국경없는의사회의 구급차를 만났는데, 폭우 속에 하루만 더 걸었더라면 아기의 생명을 구하기에 너무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이 된 콩고민주공화국의 응급 사태

앞서 말한 이 가족은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서 벌어진 폭력 분쟁으로 실향민이 된 170만 명 중 일부입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한두 차례도 아니고 수없이 벌어진 분쟁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소유물마저 잃어야 했던 콩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1992년부터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서 이 사람들에게 긴급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오늘도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사람들은 매일 같이 응급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팀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홍역과 콜레라 유행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만 하더라도 장티푸스가 창궐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 의료시설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의료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여러분이 20년 전 발생한 르완다 대학살을 기억할 때면, 콩고나 세계의 다른 곳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절망적인 상황들도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콩고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무장 집단의 약탈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폐렴처럼 막을 수 있는 질병으로 매일 어린 아이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매일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다가 죽어가고, 여성들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됩니다. 이들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