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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새로운 생명을 만나는 감동은 아프리카에서도 똑같았습니다.

2015.04.28

정의, 산부인과 전문의로 대학병원에서 모성태아의학을 전문으로 근무하다가, 2011년부터 국제 인도주의 의료 구호 단체 국경없는의사회 구호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과 2013년 두 차례 콩고민주공화국에 파견되어 산부인과 진료를 지원하고 현지 의료인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했다. 현재는 천안의 한 병원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하면서 다음 파견을 준비하고 있다.

시험 삼아 가보자… 후회는 가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구호 활동에 참여하기로 마음 먹은 뒤 실제 현장으로 떠나기 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2003년 처음 국경없는의사회에 문을 두드리고 채용 인터뷰까지 모두 마친 뒤 중동으로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가족의 반대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막연한 두려움에 결국 현장 파견을 포기하고 8년이 지난 뒤 어렵게 용기를 내 국경없는의사회의 문을 다시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가게 되었던 곳이 바로 이름도 낯선 곳,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가보고 싶었으니까 더 늦기 전에 일단 가보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조금 배워둔 불어 덕분에 불어권 국가인 민주콩고에서 두 번 이나 활동하게 되었는데, 2011년 처음 파견된 곳은 2000미터 산악지대에 위치한 칼롱게(Kalonge)였고, 2013년 두 번째로 파견된 곳은 평지에 있는 샤분다(Shabunda)였습니다.

두 지역 다 남키부(South Kivu)에 속해있었지만, 칼롱게는 고산지대라 아프리카라는 말이 무색하게 쌀쌀한 날씨였던 반면, 샤분다는 무덥고 말라리아가 극성인 전형적인 아프리카 초원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도 받기 어려운 민주콩고

민주콩고는 국경없는의사회가 거의 매년 가장 많은 예산을 책정해 활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그만큼 주민들이 쉽게 의료시설을 찾기도 어렵고, 가장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마저도 받기 어려운 곳이기도 합니다.

민주콩고에 도착해서 만나본 현지 주민들은 생각보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에 호의적이었습니다. 로고가 그려진 차량을 탄 국경없는의사회 직원이나 활동가들을 보면 항상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인도주의 의료 활동에서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해 나가는 일은 의료지원 활동만큼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주민들에게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활동을 하는 단체가 긍정적으로 인식되지 못하면 현장에서 지원 활등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주콩고 산모사망률 730명, 한국의 27배

민주콩고의 산모사망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인데, 2013년을 기준으로 10만 명 당 산모 사망률이 한국보다 27배나 높은 730명에 달합니다.

산모의 배 크기를 줄자로 재서 만삭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손으로 만져서 아기 머리가 얼만큼 아래로 내려와 있는지 진단해야 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로 한국에서 일할 때, 고위험 산모와 태아 이상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산과가 제 전문 분야였습니다. 민주콩고활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산부인과 진료를 담당했는데, 이 곳에서의 진료는 한국에서의 진료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산모들이 산전 검사를 한 번도 받지 않고 병원에 출산하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산모들은 본인 나이를 정확히 모르거나(물어보면 늘 18살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지막 생리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임신 주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환자들에 대한 신상 정보가 없다 보니 정확한 진단이 어려웠습니다. 의료시설도 한국처럼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모의 배 크기를 줄자로 재서 만삭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손으로 만져서 아기 머리가 얼만큼 아래로 내려와 있는지 진단해야 했습니다.

오로지 두 손과 경험에 의해서만 하는 진단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도구가 있었는데, 초음파기계에 익숙한 저와 달리 현지 조산사들은 세심히 듣고 꽤 정확하게 판단을 잘했습니다.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두 손과 경험에 의해서만 진단을 해야 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활동을 하는 동안 병원에서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신생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영양실조, 말라리아, 콜레라 등으로 산모가 유산이나 사산으로 아이를 잃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하루는 만삭의 산모가 병원을 찾았는데 조산사가 심장소리를 듣더니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출산이 시작되었고, 예상대로 난산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모두 받고 난 후 또 한번의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쌍둥이가 아닌 세 쌍둥이를 출산했던 것입니다.

세 쌍둥이를 출산한 산모는 하혈을 많이 했고 세 아기들은 1.2-1.3kg 정도로 미숙아였지만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난 듯 했습니다. 산모는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음날 세 쌍둥이 중 한 아이가 갑자기 숨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다른 아이 한 명, 그 다음날엔 마지막 남은 아이 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 아이를 모두 잃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엄마의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큐베이터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민주콩고에서 2kg 미만의 조산아나 미숙아를 살리는 일은 어렵습니다. 간이발전기를 통한 산소공급도 쉽지 않고, 산모나 태아의 영양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산모가 만삭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삭에 장작이나 바나나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산모가 하혈을 심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수혈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맡았던 또 다른 일은 바로 함께 일하는 현지 의료진과 조산사를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초음파기계를 사용하는 방법, 분만할 때는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출혈이 심한 환자를 치료하는 법, 약물 사용법 등을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도 물론 보람 있었지만, 현지 의료진들이 배움에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면 ‘역시 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민주콩고에는 전문의 제도가 거의 없습니다. 배울 교재도 마땅치 않아 현지 의사들은 50년 전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교육에 목말라 있었던 그들은 항상 더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금새 체득했습니다.

조산사들은 1주일에 두 번,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산전 관리 교육을 했습니다. 매번 교육에는 50-60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3~4시간을 걸어서 교육을 받으러 오곤 했습니다.

비록 민주콩고의 분쟁상황은 아직도 심각하지만, 뱃속의 아기를 건강하게 출산 하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던 엄마들의 힘과 국경없는의사회와 같은 단체들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더 많은 여성들과 그들의 아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콩고 활동을 통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실감할 때도 많았습니다. 앞으로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가로서 다시 또 현장에 가게 된다면 그땐 더 많은 준비와 노력으로 현장활동에 참여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구호 현장에 가서 세계 각지에서 온 동료들을 만나보면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단한’ 각오 없이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사실 마찬가지였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 주변에서는 슈바이처나 나이팅게일과 같은 숭고한 희생 정신을 갖고 있다고 오해할 때도 많습니다.

‘한번 가보자’라는 단순한 결심과 편안한 일상에 대한 지루함이 저를 민주콩고로 이끌었던 것뿐인데 말입니다.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모두가 반드시 의사나 간호사와 같은 의료진이 아니어도 됩니다.) 국경 너머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와 시간, 그리고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만 있다면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활동가들이 그렇게 한 명 두 명 늘어난다면 민주콩고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 중 충분히 예방 가능한 합병증으로 사망하거나 아이를 잃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 글은 스토리펀딩에도 개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