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포 동부에 포위된 주민들은 남아 있으면 전멸당할지도 모른다며 살던 집을 떠나라는 통보를 들었다. 다가올 일에 대비해 사람들이 마음을 다잡고 있는 지금, 알레포에 살았던 아말 압둘라(Amal Abdullah)는 4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아말도 자라 온 알레포 동부를 떠나라는 통보를 들었다.
시리아 알레포 출신의 36세 여성 아말 압둘라(가명)가 요르단 수도에 현재 세들어 살고있는 자신의 집 침대위에 앉아있다. 아말은 암만의 국경없는의사회 재건수술병원에서 있을 마지막 진찰을 앞두고 있다.
2012년 7월 중순이었어요. 당국은 알레포 동부에 있는 우리 동네에서 대피하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를 맞게 될 거라고 했어요.
저는 평생 알레포에서 살았어요. 참 아름다운 날들이었죠. 사람들은 서로 도왔고, 자유가 있었거든요. 경제도 번창하고 있었어요. 서른두 살이었던 저는 부모님, 형제자매와 함께 살았고, 쇼핑센터 상가에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자 모든 게 달라졌고, 그동안 우리가 누렸던 삶도 잃어 버렸어요.
우리 동네 살라헤딘(Salaheddine)을 떠나라는 당국의 통보에 그 말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설마 폭격을 맞겠어?’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을 버려두고 떠나길 원치 않았고, 대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저와 우리 가족은 친척들이 있는 알 칼라세(Al Kalaseh)라는 곳으로 갔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홀로 살라헤딘에 남으셨어요.
저는 이따금씩 살라헤딘에 가서 아버지도 뵙고 옷가지도 챙겨오곤 했는데, 사실 그건 몹시 위험한 일이었어요. 폭탄이 터지고 지상전이 계속되었고, 거리엔 차들도 별로 없었거든요. 전기도 물도 통신도 모두 끊긴 상태였어요.
알 칼라세는 그에 비해 처음에는 차분하고 평화로웠어요. 알레포 한가운데 있는 알 칼라세 부근에는 성채가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채소 시장도 있었어요. 하지만 완전히 평화롭다고는 할 수 없었어요. 하늘에 떠 있는 헬리콥터와 항공기가 내는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몇 주 동안은 비교적 평범한 일상을 보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모 댁에서 가족 모임도 하고, 치과도 가고 그랬어요.
8월 1일 저녁, 사촌과 함께 집에 걸어가는데 갑자기 근처에 폭탄이 떨어졌어요. 뭔가 번쩍거리는 것도 봤고, 폭발 소리도 들었어요. 누군가 우리를 한 건물로 끌어당겼지만 우리는 근처 친척 집으로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달려가는데 두 건물 사이에 또 다른 폭탄이 떨어졌어요. 거리는 공황 상태였어요. 다들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로 뛰어갔고, 땅바닥에는 부상자들이 보였어요. 그때 또 다시 누군가 우리를 실내로 끌어당겨서 우리는 아파트 1층에 대피했어요.
사람들은 초를 켰어요. 저는 소파에 앉아 기다렸죠. 식구들이 연이어 대여섯 번이나 제게 전화를 걸었어요. 어디 있냐고 물으면서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고 말해 주었어요.
곧이어 강한 불빛과 함께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정신이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소리를 질렀는데,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바닥에는 제 옆에 서 있던 여자 분의 시신이 보였어요. 그때 누군가 저를 담요로 감싸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어요.
구급차 안에서는 제 주위를 둘러싼 남자 분들이 제게 이것저것 물었어요. “이름이 뭐예요?”, “식구들 있어요?”, “휴대폰은 어디 있어요?” … 사람들이 끝내 제 휴대폰은 못 찾았지만, 저는 겨우겨우 언니의 휴대폰 번호를 말할 수 있었어요. 전화를 받은 언니는 제 이름을 듣고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죽지는 않았죠. 다만 너무 심한 부상을 입은 거예요.
저는 압둘 아지즈(Abdul Aziz) 야전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사람들은 제게 마취제를 주고 출혈을 막으려고 애를 썼어요. 강한 폭발력 때문에 몸이 벽에 부딪치면서 팔꿈치 뼈가 부서졌어요. 다리는 유산탄 때문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손, 팔, 가슴, 갈비뼈, 배에도 유산탄 부상을 입었어요.
그러고 나서 저는 알 라지(Al Razi) 공공병원으로 이송됐어요. 혼잡하고 위험한 길이었죠. 포격이 계속되고 있었고, 저는 그때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그 지역 전체가 폭격을 맞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바로 수술실로 옮겼고, 마취가 시작될 즈음 외과의사 선생님이 저더러 코란 한 구절을 외워 보라고 하셨어요. 그 뒤로 기억나는 게 없어요. 그날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수술은 10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저는 그 후로 5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마땅히 가 있을 안전한 곳이 없었어요. 뼈에 심한 부상이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공포였어요. 비행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고통이 더 심해졌어요.
매일 밤낮으로 폭격 소리를 들었고, 유탄이 마당에 떨어져 언니도 부상을 입었어요. 전기도 통신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부상당하던 날 일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어요.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겨우 알레포를 떠나 요르단으로 피할 수 있었죠.
침대에 앉아있는 아말의 모습을 국경없는의사회 한 스탭이 그림으로 그렸다. ⓒNatasha Lewer/MSF
부상을 입고 나서 4년 동안, 제 다리와 손에 입은 부상을 치료하려고 수술을 20번이나 받았어요. 암만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재건 수술 병원에서 뼈를 이식하고 후속 치료를 받으면서 1년을 보낸 지금, 저는 거의 퇴원을 해도 될 상태가 되었어요. 걸어 다닐 땐 목발이 필요하지만, 인조 관절을 붙인 손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폭격과 포위…알레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처지를 생각하게 돼요. 돌아다니는 것조차 너무 위험한 상황 속에서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나요. 알레포 사람 그 누구도 제가 겪은 것을 똑같이 겪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평범한 소녀처럼 살면서, 전에 제가 누렸던 그런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하고 사람들이 물어볼 때면 정말 슬퍼져요. 하지만 이게 운명이니까 받아들여야죠. 그래도 이렇게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에요. 완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 환자의 요청으로 이름은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