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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The Crossing” - 구조선 ‘프루던스’ 위의 밤

2018.02.28

“The Crossing”은 파노스 픽처스의 사진작가 앤드류 맥코넬이 진행한 사진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2017년 7월 구조선 프루던스(Prudence) 호가 지중해상에서 야간 구조로 구해낸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했습니다.

앤드류 맥코넬

이 프로젝트는 달빛이 비취던 밤중에 국경없는의사회 구조선 프루던스 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한데 모은 것입니다.

촬영이 진행된 곳은 리비아 연안 수색·구조 지역, 지중해 중부, 시칠리아 해안이었습니다. 작품 분위기는 비교적 어둡습니다. 지중해 횡단을 시도했던 모든 이들이 겪은 일들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죠. 각 작품에는 주인공이 집을 떠나 목숨을 건 위험한 여정에 오른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바로 지중해입니다. 모든 작품에 지중해가 등장하죠. 달빛을 받은 지중해는 작품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춤을 추는데, 어른거리는 안개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중해는 누구를 통과시키고 누구를 가로막을지 결정하는 까다로운 감시인처럼 엄중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치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작품도 많은데요. 물 속에 빠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물 밖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효과 속에 작품 분위기는 더욱 오묘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로써 최근 몇 년간 지중해에서 사라진 소중한 사람들의 생명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부카르 은지에 (25세, 감비아)

저는 안 좋은 집안 상황 때문에 감비아를 떠났어요. 저는 세네갈, 말리, 부르키나파소를 거쳐 니제르까지 갔어요.

니제르에서는 밀수업자들을 통해 알제리로 가게 됐죠. 거기 갔더니 우리를 어느 집으로 데려가더니 감비아 돈으로 15,000달라시(한화 약 40만 원)를 내라는 거예요. 그들은 돈을 보내 달라고 집에 전화를 걸게 했어요. 다행히 저는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는 감비아 형제들을 따라 알제리 남부 타만라세트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붙잡혀서 같은 문제에 부딪쳤어요. 돈이 필요했죠. 이번에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감비아에 있는 식구들이 돈을 보내야 했어요.

그들은 집에 전화를 걸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마구 때렸어요. 만약 전화를 받는 부모님이 돈을 내지 않겠다고 하면, 붙잡아 둔 사람을 마구 때리고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에게 우는 목소리를 들려주기까지 했죠. 그렇게 해서 저는 리비아에 있는 사브라타까지 오게 됐어요. 그곳 사람들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악질이에요. 그들은 심지어 우리에게 제대로 된 물을 주지도 않았고, 리비아 사람들은 무례했어요. 때로는 나가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는 모든 사람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2~3백 명과 함께 살았어요. 정말 끔찍했죠. 그 집에는 창문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바닥에서 잤어요. 끼니를 얻으려면 일을 해야 했어요. 집에 계신 부모님께서 뱃삯을 보내 주셨어요. 어느 날 아침, 타고 갈 배가 준비됐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배를 보니까 플라스틱 보트더라고요. ‘이건 절대 못 타겠다’ 싶었는데 총을 든 사람들이 앞에서 지키고 서 있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배에 올랐죠.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배 안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고, 연료 때문에 모두가 고통스러워했어요. 배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칫하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죠.

우리에게 유럽은 어디보다도 좋은 곳이에요.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요. 이런 식으로 오겠다고 하면 말릴 거예요.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저는 아마 감비아에 그냥 있었을 거예요.

오마이마 (21세, 모로코)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니?” 어머니는 그렇게 물었죠. 저는 … 혹여 제가 죽으면 절 용서해 달라고 답했어요.

저와 제 형제들은 아버지 때문에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았어요. 우리는 형제가 넷이고 제가 중간에 있는데요. 아버지는 약물 중독이에요. 학교 갈 돈을 주시지 않아 우리 모두 중퇴했어요. 아버지는 직업도 없어요. 건강했을 때도 온종일 집에서 잠만 주무시는 바람에 어머니께서 가정부 일을 해서 우릴 먹여 살리신 거죠. 아버지는 틈만 나면 벨트로 어머니를 때렸어요. 피가 날 때까지 때리고 또 때렸죠. 집에 돌아오면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들고 우릴 때렸어요.

어느 금요일,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는 저더러 뭐를 해서든 돈을 구해 오라고 했어요. 심지어 제 몸을 팔아서라도 말이에요. 제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고, 저를 이리저리 밀치고, 벽에 제 머리를 찧어 코피가 나기까지 했어요. 약물 때문에 아버지는 미친 사람이 돼 버렸어요. 어머니와 저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나머지 자주 쓰러지곤 했어요. 경찰을 부르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화를 내시면서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는 날엔 우리 다 거리로 나앉을 거라고도 하셨어요.

유럽으로 가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씀 드리자 어머니는 슬픈 모습으로 저를 말리려고 하셨어요. 당신이 그렇게 아픈데 어떻게 떠날 생각을 하느냐고 하시면서요. 그저 집에 있으면서 일을 구하고 결혼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며 저를 설득하시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려요. 저는 어머니에게 여비를 좀 달라고, 내가 공부를 마치고 나면 꼭 갚겠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제가 죽을까 봐 걱정하셨어요.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니?” 어머니는 그렇게 물었죠. 저는 … 혹여 제가 죽으면 절 용서해 달라고 답했어요.

결국 저는 비행기를 타고 튀니지로 갔어요. 튀니스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 근처에 있는 삼촌 집에 갔어요. 하지만 삼촌도 겨우겨우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에 오래 있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유럽으로 가는 배에 태워 줄 만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봤어요. 그렇게 한 밀수업자가 저를 사브라타에 있는 한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다른 여성들과 젊은 남성들도 함께 있었죠. 우리는 거기서 몇 개월을 머물렀어요. 남자들은 구타를 당했지만, 그래도 소녀들은 잘 대해 줬어요.

저는 모로코 돈으로 20,000디르함(한화 약 240만 원)을 지불했어요.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집에서 빌려준 돈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빨리 짐을 챙기라는 거예요. 그렇게 배에 탔는데, 저는 그 배에서 사람들이 죽는 걸 제 두 눈으로 목격했어요. 배 바닥에는 물이 20cm 높이까지 차 있었고, 어린 아이들도 많았어요. 저는 너무 멀미가 나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어요. 배에 타 있는 동안 여러 번 토했어요.

구명조끼를 받긴 했는데 잘 살펴보니 가짜였어요. 그걸 알아챈 모로코·시리아 출신 젊은 남자들이 다투고 싸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들과 아이들은 배가 뒤집힐까 봐 공포에 떨었어요. 바다는 정말 위험한 곳이에요. 저는 다시는 그런 배를 타지 않을 거예요.

다행히 아무도 저를 해치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구조되어 신께 감사해요. 저는 앞으로도 공부를 계속할 거예요. 외국어도 배우고 일도 구할 거예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어요. 안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평생 가정부로 살아야 하니까요. 아버지는 늘 그랬듯 아무 일도 안 하고 사시겠죠. 저는 모로코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죽을 거예요.

웨삼(21세, 시리아 다라)

어두워서 배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어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 작은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탔는지 알게 됐죠.

혁명이 처음 일어나던 시절, 아버지께서 투옥되셨어요. 우리 가족은 반군이나 정부군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아버지가 붙잡혀 간 뒤로 아버지에 대한 거짓 혐의와 신고들이 나왔어요. 그 다음에 아버지는 또 잡혀가 열흘간 감옥에 계셨죠. 그곳에서 아버지는 구타도 당하고 전기 충격 같은 갖가지 고문도 당하셨어요. 세 번째 잡혀가신 후로는 나오시지 못했어요. 그게 벌써 6년 전 일이에요. 그 후로 아버지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어요. 우린 아버지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처음 잡혀가셨을 당시 저는 열다섯 살이었어요. 그때 시리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격과 교전이 벌어졌죠. 어느 날, 어머니와 동생들이 자고 있는데 지붕에 미사일이 떨어졌어요. 주변 집들은 전부 파괴됐고, 삼촌은 발에 부상을 입으셨는데 합병증 때문에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어요.

열다섯 살에 저는 동생들과 어머니를 부양해야겠다는 생각에 시리아를 떠났어요. 삼촌이 계신 리비아로 향했죠. 우선 육로로 이동하면서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로 갔어요. 시리아 여권을 가지고 버스를 타고 합법적으로 리비아에 들어가서, 삼촌이 피자 가게를 하고 계신 트리폴리로 향했어요. 리비아에서도 혁명이 계속되고 있더라고요. 트리폴리에서 저는 사람들이 물건을 훔쳐 가는 것을 목격했어요. 저도 도둑을 맞았고, 일하던 식당에서 공격도 당했어요. 그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식당에 와서 행패를 부렸어요. 무기를 들고 쳐들어와서는 사람들을 때리고 돈을 훔쳐갔지만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죠.

삼촌과 식당 분들은 납치를 당했어요. 그들은 돈을 주지 않으면 모조리 잡아갔어요. 무기로 때리고 전기로 고문했어요. 우리는 리비아 돈으로 약 9,000디나르(환화 약 130만 원)를 몸값으로 지불했어요. 리비아에서 저는 사람들을 믿지 못해 밖에 잘 나가지 않았어요. 밤에는 도둑과 살인자들이 거리를 배회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볼 일은 다 낮에 처리했죠. 밤에는 슈퍼마켓이나 약국도 갈 수 없었어요.

최근 몇 년간 저는 밤이면 무조건 실내에 있었어요. 일찍 식당 문을 닫고 집에 갔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일하러 가서 집에 돌아오곤 했죠. 그렇게 계속 살았어요. 시리아 사람들도 잡혀가거나 도둑을 맞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제 사촌 아흐메드도 식구들을 부양하는 데 보탬이 되려고 2015년에 리비아에 왔어요. 아흐메드는 리비아에 온 뒤 유럽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죠. 저는 수년간 그곳 생활을 견디며 살았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그 나라에 살고 싶지 않았어요. 바다에서 죽든지 아니면 다른 나라로 가서 살든지 해야 했죠. 거기서 사느니 바다에서 죽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 물론 겁이 났어요. 하지만 리비아를 떠나야 했어요.

우리는 평소 알고 지내던 시리아 사람들에게 돈을 좀 지불했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연결해 줬어요. 그렇게 해서 이동할 계획을 세우게 됐어요. 그리고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날씨가 괜찮으니 이제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소식이었죠. 새벽 한두 시경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려고 해안가로 나왔어요. 우리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물속을 헤치고 나무 보트에 올랐어요. 구명조끼는 제 돈으로 사둔 게 있었어요. 배에 탔더니 어지럽고 멀미도 났고, 정말 너무 무서웠어요.

어두워서 배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어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 작은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탔는지 알게 됐죠. 배 타고 가는 내내 저는 계속 토했어요. 그러다 커다란 구조선을 봤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무사히 도착하게 돼서 신께 정말 감사했어요. 유럽에서 저는 새로운 언어도 배우고, 공부도 하고, 일을 해서 우리 가족들을 부양할 거예요. 사실은 그게 가장 중요한 거죠. 그러고 나면 제 미래를 구상해 볼 거예요. 어딘가에 정착해서 제 마음도 새롭게 다지고, 안전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