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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아직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2018.08.27

Ikram N'gadi / Médecins Sans Frontières

미얀마에서 고문과 폭력사태를 겪고 살던 곳을 떠나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로 이주해 온 아부 아흐마드(52)

아부 아흐마드, “늘 걱정이 많아요. 미래가 걱정입니다” 

아부 아흐마드(52)는 자녀 8명(딸 4, 아들 4)을 둔 아버지다. 딸 루키아(11)는 2017년 8월 폭력사태 직전 몸이 마비되었다. 방글라데시에 온 후 루키아는 7개월 넘게 쿠투팔롱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의료 시설에서 보냈고, 지금은 며칠에 한 번씩 가서 욕창 부위를 치료받는다. 아부 아흐마드가 가족이 어떻게 도망쳐 왔는지, 방글라데시에서 사는 것이 어떤지, 장차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지 들려주었다.

분쟁 전에는 소, 염소, 농지가 다 있었습니다.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급자족해 살았죠. 하지만 우리는 미얀마 정부로부터 숱한 위협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정부에서 알아채기라도 하면 붙잡아 갔으니까요. 어딜 다니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검문소 밖으로는 통행할 수도 없었죠. 우리 지역 안에서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승려 혹은 다른 (부족) 지역사회 사람들은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전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찌르고 집을 불태웠습니다. 그보다 얼마 전에 제 딸 루키아 몸이 마비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하더니 언젠가부터 허리 아래 쪽으로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이들을 모두 불러다 놓고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뭘 하든지 간에 체포나 살해를 당할 수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루키아와 함께 달아날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루키아를 살릴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루키아를 데리고 먼저 방글라데시로 가셔야 돼요. 우리들은 뒤따라 갈게요.” 그래서 저는 다른 아이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라고 당부한 뒤, 루키아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방글라데시로 떠났습니다.”

미얀마 탈출

집을 나선 뒤 … 우리는 (드러내 놓고) 마을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무기를 든 정부군이 사방에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루키아를 옮겨줄 사람들을 불러 산을 타고 몇 마일을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밤늦게 방글라데시가 보이는 강가에 도착했어요. 기다리다가 드디어 배를 만났는데 20~30명이 우리와 함께 탔습니다. 선장은 우리 모두를 안전하게 방글라데시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도착했더니 방글라데시 국경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참 많이 도와주었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음식과 물과 비스킷도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경찰들이 불러준 버스를 타고 쿠투팔롱 캠프로 갔습니다.

Dalila Mahdawi/MSF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 테크나프 근처 강변에 배들이 있고 뒤쪽으로 미얀마 산들이 보인다. 방글라데시로 건너온 로힝야족 다수는 걸어서 이 산들을 헤치고 넘어와 강을 건넜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니 불안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픈 딸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몰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쿠투팔롱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의료 시설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곳 분들이 제게 안겨 있는 루키아를 데려가 환자로 입원시켰습니다. 루키아는 그 병원에서 일곱 달 반을 보냈습니다. 엑스레이 촬영과 수혈도 받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의사 선생님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끼니도 다 제공받았죠.

루키아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라카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빠졌습니다. 쿠투팔롱에 온 이후, 두고 온 일곱 아이들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집이 불탔다고도 하고 우리 아이들이 도망쳤다고도 했습니다. 전화기 같은 연락 수단이 전혀 없어서 아이들과 소식을 나누지 못한 우리는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얼마 뒤, 아이들이 방글라데시에 와서 우릴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쿠투팔롱에 온 아이들은 루키아에 대해 수소문해 국경없는의사회 시설에 있던 우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두 달 만에 아이들과 다시 만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다시 찾으니 온 세상을 다시 찾은 듯 기뻤습니다.


방글라데시 생활

방글라데시 정부는 우리에게 집을 지을 나무, 대나무, 비닐 시트를 주었습니다. 기름과 쌀, 렌즈콩도 배급받는데, 우리는 기름과 콩 일부를 팔아서 생선, 채소, 칠리고추를 삽니다. 이렇게 하면 100~200타카(1~2유로)를 벌 수 있습니다. 비록 가진 돈은 없지만 생존은 해야 하니까요. 100~200타카로 한 달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음식들을 먹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소득은 전혀 없습니다. 일을 할 수만 있다면 훨씬 생활이 수월할 텐데 그럴 기회가 전혀 없네요. 일할 기회도 전혀 없고 저는 이제 기운도 다 빠져버렸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돈을 벌어 아이들을 먹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캠프에서 루키아를 돌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장애가 있는 루키아를 데리고 며칠에 한 번씩 캠프를 나가 병원에 다녀와야 합니다. 집에서 도로까지 가는 길도 몹시 험합니다. 캠프에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너무 많아서 제가 루키아를 안고 가야 하거든요. 우선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준 휠체어를 길에다 가져다 놓고, 다시 돌아와 루키아를 휠체어가 있는 곳까지 안고 가야 합니다. 그 다음 병원까지 휠체어를 밀고 오죠. 캠프 안에는 집을 지을 평평한 땅이 전혀 없었습니다. 돈이 있었다면 병원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이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Dalila Mahdawi/MSF

발루크하리 캠프에서 벽돌을 나르고 있는 로힝야 난민. 이 벽돌들은 몬순(장마철) 호우에 대비해 도로와 샛길 같은 기반시설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병원에서 갖가지 검사와 치료를 해봤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루키아 몸에 왜 마비가 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루키아가 다시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항상 신께 빕니다. 가끔 루키아는 외국으로 가서 치료도 받고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걱정거리도 많아지고 스트레스에 짓눌립니다. 저는 일할 기운과 능력을 전부 잃었습니다. 늘 걱정이 많아요. 미래가 걱정입니다. 먹을 것, 옷, 안전,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10년, 5년, 4년, 아니 단 1개월을 산다고 해도 이런 고통 속에 지내야 할 겁니다.

루키아가 돌아다닐 수만 있어도 훨씬 행복해할 텐데 참 안타까워요. 루키아는 휠체어라도 타고 여기저기 데려가 달라고 하는데 캠프가 너무 언덕배기에 있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가 휠체어를 끌고 언덕 지대인 캠프 여기저기를 다니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루키아를 데리고 다녀야 해서 저도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버마(미얀마) 사람들 … 돌아갈 겁니다

우리는 무국적자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버마(미얀마) 사람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거기 살았고, 우리 조부모님들이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탯줄을 자른 곳도 버마(미얀마)입니다. 나라가 좀더 평화로워지면 우리는 그 땅으로 돌아갈 겁니다. 우리 집, 땅, 소, 염소를 다 돌려준다면 말입니다. 한 나라 출신 국민들이 다른 나라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신께서 우리를 여기 데려다 놓으셨으니, 신의 뜻이 있다면 우리를 다시 우리나라, 우리 집으로 데려다 놓으실 겁니다.

우리나라로 돌아갈 준비는 되어 있는데, 아직도 그곳에서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