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파델(Abu Fadel)과 하산(Hassan), 이만(Iman) 모두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Idlib) 주에 살고 있다. 다른 270만 명의 시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전쟁으로 여러 차례 피난을 가야 했고, 이들리브까지 오게 되었다. 반군의 마지막 요새는 시리아 정부군과 동맹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폭파되었고, 이들리브에는 9년 간의 전쟁으로 삶이 산산조각 나고 황폐해져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였다. 터키 국경을 등진 곳에서 아부 파델과 하산, 이만은 자신들의 일상을 전했다.마치 벽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 기다림, 전쟁의 공포와 참상으로 얼룩진 일상이다.
6월 중순 이들리브 주에 공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마아랏 알 누만(Maarat-Al-Numan)의 서부 구역이 표적이 되었다. 반군 통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국경없는의사회가 지원하고 있는 다나(Dana), 사르마다(Sarmada), 아트메(Atmeh) 인근의 실향민 캠프로 이동했다. 실향민들은 부패와 범죄, 사회적 폭력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끊이지 않는 시리아 정부군의 공격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들이 대피할 수 있는 지역은 줄어들고 있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2013년 시리아 정부 세력은 다마스쿠스 동쪽의 반군 요새가 있는 동부 구타(Ghouta)를 포위했다. 같은 해 여름 이곳에서는 화학무기 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이 발생했다. 포위 시점으로부터 4년이 지난 2017년, 동부 구타는 전투를 중단하기로 한 안정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습은 지속되었고, 이제는 이곳 주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만 오움 지아드(Iman Oum Ziad)와 8명의 자녀들은 원래 이곳에 살았다. 동부 구타의 다른 여러 시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만은 정부 통제 지역에 남아 있는 것보다 이들리브 주로 가기를 택했다.
"시누이는 2013년 일어난 화학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우리는 밤낮으로 이어지는 공습과 포위로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어요."
지역이 완전히 포위되어 이만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어머니는 약이 없어 사망했다.
43세인 이만은 구타 지역 내에서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 차례 피신해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살아 남기 위해 매일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야 했어요. 집도 대여섯 번 옮겼지만 공습은 계속해서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러스트: Hélène Aldeguer https://helenealdeguer.com/
2018년 2월, 시리아군은 대규모 공중 공격을 감행했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부 구타가 정부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이만은 2018년 4월 가족들과 함께 이들리브로 피난을 갔다.
"우리는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던 곳을 떠나야 했던 날이었으니까요. 이곳에서 우리는 큰 고통을 겪었고, 끔찍한 일들을 보았습니다."
이만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이들리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렘(Harem)에서 내려 사라케브(Saraqeb)로 갔고 그곳에 있는 집에서 잠시 머물렀지만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또 다시 집을 떠나 이들리브 주에 있는 여러 캠프 중 하나로 이동했고, 지금까지 그곳에 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요.공습이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어요.”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만은 집안일을 했고, 남편은 아들과 함께 밭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일을 하던 아들은 집으로 빵을 가져오다가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해 살아서 함께 구타를 떠나지 못했다. 이제 가족 중 아무도 일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 날이 갈수록 생활 형편은 어려워지고 있다. 시리아 파운드의 가치는 2020년 5월 초 절반으로 급락했고,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졌다. 시리아 파운드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시리아인 대부분이 저축을 하고 있는 레바논에 닥친 위기와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제재, 코로나 19 유행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때문이다.
일러스트: Hélène Aldeguer https://helenealdeguer.com/
이만은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정권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구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가면 우리를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을 시키겠다고 확실히 밝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어요. 이들리브도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캠프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깨끗한 물은 거의 없으며, 전기도 없다. 게다가 코로나 19로 지난 2개월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전투와 공습 때문에 학교를 꾸준히 다닐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구타에서서는 거의 2년 동안 학교를 가지 못했어요.”
이만의 두 딸은 동부 구타에 남았다. 서로 음성 메시지나 전화 연락을 드물게 한다. 전화를 걸었다가 정부군에게 체포를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몇몇은 이들리브에, 다른 몇몇은 동부 구타에 있어요."
10살 된 딸 자나(Jana)는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날 때마다 공포에 질린다.
"아이들을 화장실이나 계단 아래에 숨기곤 했어요. 자나는 아무 이유 없이 울었고, 항상 슬퍼했습니다. 저를 딸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아이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자나는 전쟁과 전투기에 대한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살던 동부 구타도 포위되었고, 이번에는 이곳 이들리브 마저 포위되었어요."
일러스트: Hélène Aldeguer https://helenealdeguer.com/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지만,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산 아부 노아(Hassan Abou Noah)는 홈스(Homs) 주 탈비세(Talbiseh)의 학생이었다. 그는 기자로서 시위에 참여했다. 이 33세 청년은 "저항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다고 말한다. 정부군과 반군 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알레포(Aleppo)의 칸 알-아살(Khan Al-Assal) 지역으로 대피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지냈지만, 2019년 1월 말 공습이 격해지자 또 다시 피난을 가야 했다.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마치 슬로우 모션 같았어요. 제 주위 사람들이 뛰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우리는 차에 올라탔고, 바로 출발했어요. 마치 개미 떼가 이동하는 것처럼 피난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이들리브로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전투기는 계속해서 폭탄을 투하했다. 하산과 아들의 머리 위를 지나 50 미터 떨어진 지점에 낙하하기도 했다.
하산은 2019년부터 이들리브 주에 살았다. 집세를 낼 수가 없어서 이 지역에 집을 갖고 있는 친구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다른 마을에 있는 친척집에서 지내고 있다. 돈이 있건 없건, 마을에는 모두가 지낼 수 있을 만큼 숙소가 충분하지 않다. 다른 지역과 무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가는 터무니 없이 높다. 이들리브 주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들리브에는 수돗물이 없기 때문에 물을 사야 하는데,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물도 매우 비싸다.
“이들리브를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암울한 마을 같아요. 마을도 캠프도 모두 마비되었고,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경험했습니다. 두렵기도 했고, 또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공허하기도 했고, 정말 간혹가다 행복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상황에 지나치게 무뎌진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예전에는 총탄 소리가 나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전투기와 공습 소리가 들려도 다른 이야기를 나눠요.”
일러스트: Hélène Aldeguer https://helenealdegu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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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비세에 남은 하산의 친척과 친구들은 전투가 가능한 연령대의 남성들은 바깥에 나가길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시리아군에 강제 징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내 아들 아담(Adam)은 공습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천둥소리냐고 묻는다. 하산은 그렇다고 대답해 준다.
“시리아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지붕 아래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이에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치든 우리의 삶이든,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지만,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리아를 떠나려면 터키로 가기 위해 밀수업자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하산의 가족 모두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약 12,000 달러가 필요하다.
“언제든 제 양쪽 신장을 팔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하산이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이 곳에 갇혔고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40세인아부 파델(Abou Fadel)은 이들리브 주 마라앗 알 누만(Maarat Al-Numan)에서 5km 떨어진 탈마네스(Talmenes)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난 6개월 동안 아내, 15살인 첫째와 4살인 막내를 포함한 자녀 5명과 함께 이들리브 서쪽의 임시 캠프 내 20 m2가 채 되지 않는 작은 텐트에서 살았다.
일러스트: Hélène Aldeguer https://helenealdeguer.com/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물어볼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나가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할 겁니다. 그에 대한 답은 잘 살아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저는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있습니다.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죽기 전에 갚을 수는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구호 단체로부터 몇 차례 기부를 받기는 했지만 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부 파델은 가끔 눈을 감고 그가 태어난 탈마네스 마을로 되돌아 가는 상상을 해 본다. 그는 부모님의 2층 집 옆에서 아이들과 뛰어 놀고 있다. 그의 꿈과 희망은 모두 사라졌고, 그는 그저 2020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전쟁 이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저는 작년에 정부가 이따끔씩 폭격을 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땐 최소한 우리를 위협하는 지상군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들 걱정에 지속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잠에서 깨곤 합니다. 집을 떠나온 이후 한 번도 아이들이 학교에 간 적이 없어요. 학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는데 말이에요. 어제는 막내딸을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 곧 남편과 같이 살게 될 거예요. 딸을 위해서는 가장 나은 선택일 것입니다.”
아부 파델의 가족은 올해 초 탈마네스에 개시된 공습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공습이 5일 내내 지속되었고, 그 다음에는 지상군이 왔습니다. 피난 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는 수십 명의 다른 가족들과 함께 트럭에 올라 이들리브로 피신했습니다. 모스크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 이 캠프에 왔습니다.”
일러스트: Hélène Aldeguer https://helenealdeguer.com/
2020년 6월에는 전투로 인해 이들리브 남부와 하마(Hama) 북부에서 많은 실향민이 발생했다.
“시리아 정부는 이들리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합니다. 제 사촌은 현금을 인출하러 가던 길에 체포 당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어요. 게다가 이제 지상군이 전진해 오고 있으니, 저는 강제 징집을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감옥에 갇힐 수도 있겠죠. ”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텐트는 겨울에는 냉동고처럼 춥고 여름에는 오븐처럼 덥다. 아부 파델은 캠프 주변을 걷거나 이웃과 차를 마시면서 하루 하루를 보낸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이들은 터키 국경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피난을 갈 예정이다. 그곳은 더 안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곳에 갇혔고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