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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우크라이나: 상실감과 정신적 트라우마로 뒤덮인 전쟁 최전선

2022.12.14

하르키우의 의료시설은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Linda Nyholm/MSF

2022년 2월 말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하르키우(Kharkiv)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이 지역에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했거나 피란 의지가 없었던 노년층과 장애인이었다. 이들은 지하 저장고를 임시 거처 삼아 지내고, 얼마 없는 음식을 이웃과 나누며 끊이지 않는 전쟁의 포화를 힘겹게 견뎠다. 

우크라이나 군이 하르키우를 탈환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의료·심리적 지원에 대한 필요는 여전히 크다. 여러 지역의 의료센터가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고, 지역 주민들은 수 개월간 이어진 공포, 상실, 고립과 폭력의 충격이 남긴 심리적 상처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이에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팀은 해당 지역에서 전반적인 치료와 정신건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하르키우 지역 마을의 환자들이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소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Linda Nyholm/MSF

날로 악화하는 만성 질환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소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환자는 고령 여성으로 거동에 제약이 있거나 시청각 장애를 가진 경우가 많다. 고령 뿐 아니라 고혈압이나 당뇨 등 기저 질환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증상이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정상 혈압은 120/80mmHg이지만 혈압이 200/100mmHg까지 치솟은 환자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당연히 입원 치료를 권하겠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하죠. 그런데 고혈압을 관리하지 않으면 심각한 합병증이 올 수 있습니다. 시력 상실, 신부전, 신경 손상을 겪거나 심지어는 갑작스럽게 사망할 수도 있어요. 계속되는 전쟁으로 스트레스가 극심한 데다 의료인력과 의약품 등 물자가 부족하다보니 환자들의 건강 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부전과 같은 장기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많습니다.”_지노 만키아티 (Gino Manciati) / 국경없는의사회 의료 책임자

전쟁으로 인해 약을 구할 수 없고 식량난으로 식단을 관리하기도 어렵다 보니 이동에 제약이 생기고, 시력이 흐려지고, 근육이 퇴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는 당뇨 환자가 늘고 있다.

진료소를 찾은 건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몸을 떨고, 지속적인 두통에 시달리지만 당뇨 약을 수개월 동안 구할 수 없었어요.”_토냐 (Tonya) /당뇨 환자의 가족

국경없는의사회 의사가 당뇨환자인 마리아를 진료하고 있다. ©Linda Nyholm/MSF

토냐는 몸이 마비된 남편을 집에 두고 진료소를 찾았다. 중증 장애를 가진 다른 사람들처럼 토냐의 남편은 집 밖으로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몸이 아파 걷기 힘든 한 할머니께서 무려 30분이나 걸어서 진료소를 찾아오셨습니다. 본인이 아니라 집에 있는 아픈 남편의 약을 타러 온 거였어요. 놀랍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먼 곳에서 힘들게 걸어서 진료소를 찾는 고령 여성이 많은데 본인이 아파서 오기도 하지만 남편이나 자식들이 집 밖을 나올 수 없어서 대신 오곤 하죠. 눈에 보이는 사람만 치료하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전쟁의 여파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퍼져있습니다.”_지노 만키아티 / 국경없는의사회 의료 책임자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하기 위한 지원

2월 24일 전쟁이 발발하고 거리에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68세인 라이사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있는데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고, 하늘이 먼지구름으로 뒤덮였어요. 뒤이어 탱크가 열을 지어 이동했죠. 전쟁이 시작된 거였어요. 금방 끝나지 않겠다는 걸 직감한 후부터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음식은 어떻게 구할지, 정원은 어떻게 관리할지 등 헤쳐 나가야 할 게 많았어요. 전시 상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지만, 포탄이 빗발치는 상황에 적응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밤낮 할 것 없이 울리는 총성은 정말 끔찍해요.”_ 라이사 (Raisa) / 우크라이나 야코벤코브(Yakovenkove) 주민

라이사(Raisa)는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소에서 정신건강 지원을 받고 있다. ©Linda Nyholm/MSF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팀은 라이사의 심리 치료를 지원하면서 혈압을 내릴 수 있도록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불안이나 스트레스성 행동, 공황 발작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심리치료를 받고 있지만 계속해서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포탄이 날아다니죠. 정말 무서워서 잘 수가 없어요. 온몸에 신경이 마비되는 것 같아요.”_ 라이사 / 우크라이나 야코벤코브 주민

대부분은 악몽이나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플래시백(flashback) 증상에서 스스로 회복할 수 있지만 심리치료를 받으면 회복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심리치료만으로 부족한 경우에는 국경없는의사회 의사와 심리치료사가 함께 최선의 치료법을 찾아 환자를 지원한다. 

바실렌코바(Vasylenkova)에 사는 70세 발렌티나(Valentyna)는 전쟁으로 눈앞에서 아들 로마(Roma)를 잃었다. 발렌티나가 보는 앞에서 아들이 지뢰를 밟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부터 발렌티나는 잘 수가 없었다. 매일 밤 그날의 장면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에 부친다는 발렌티나는 전쟁이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아들까지 앗아갔다며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발렌티나를 돕기 위해 수면 및 심리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70세 여성 발렌티나(Valentyna)는 분쟁으로 인해 집이 완전히 훼손되어 피란해야 했다. ©Linda Nyholm/MSF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를 찾는 고령 여성들은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과 고립감, 외로움을 호소한다. 가족과 평범했던 일상을 한없이 그리워하며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전한다. 

삶의 목적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불안을 유발합니다. 남은 생을 위해 살기 위한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망으로 이어지죠. 이곳에 오는 어르신들은 삶의 남은 시간을 빼앗긴 것 같다고들 말씀하세요.”_카밀로 가르시아 (Camilo Garcia) /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활동 책임자

치매나 정신 질환이 있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못했거나 돌봐줄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이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다. 일부는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또 다른 이들은 이미 과부하 상태인 도심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대피했다. 구조 작업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물론 심리치료에 대한 필요가 높긴 하지만, 강인한 내면의 힘으로 모두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의 노년층에겐 숨겨진 힘이 있어요. 바로 기적 같은 회복력입니다. 많은 분께서 전쟁이 이어지고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고향을 지키겠다고 남았습니다. 내 집에 있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_카밀로 가르시아 /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활동 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