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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우크라이나: 전쟁 속 정신건강 지원

2024.05.02

짧은 회색 머리에 남색 의료복을 입은 한 여성을 따라가면 베이지색 벽이 수평으로 뻗어 있는 파이프관들과 작은 조명등에 연결된 와이어선으로 뒤덮인 지하방이 나온다. 조명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이 방에는 진찰대와 의료 장비, 약품이 구비되어 있다. 필요시에는 이곳에서 의료지원을 제공할 수 있으며, 심지어 출산도 가능하다.

안나 스베소바(Anna Svesova)는 러시아군이 도시를 점령했던 2022년 2~3월에 환자들이 이 방에서 출산했다고 말한다. 안나는 러시아 국경 근처 우크라이나 북동부 수미(Sumy) 지역의 트로스티아네츠(Trostianets)시 소재 보건부 병원 원장이다.

러시아 국경 근처 우크라이나 북동부 수미 지역의 트로스티아네츠시 소재 보건부 병원 원장 안나 스베소바. 2023년 10월. ©Nuria Lopez Torres

해당 마을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가장 먼저 점령된 곳 중 하나였다. 안나는 우리를  이 방이 위치한 미로 같은 지하공간으로 안내한다. 약 두 달 동안 대부분의 병원 부서들이 이 지하공간에 모여 있었다. 그러다가 건물이 심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알이 관통하면서 생긴 구멍들이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어요. 구멍 사이로 하늘을 볼 수 있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_안나 스베소바

우크라이나가 트로스티아네츠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은 후, 2023년 국경없는의사회는 병원 건물의 보수 작업을 도왔다. 하지만 올봄, 수미 지역에 대한 포격이 크게 증가했고, 인근에서 발생한 포탄 폭발로 인해 병원이 또다시 피해를 입었다. 병원은 창문을 184개나 잃었지만, 공격이 발생한 지 4일 만에 7개 부서 모두 24시간 가동되었다. 

정부 의사들이 근무하는 우크라이나 동부·남부·북동부 최전선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폭격과 환자들의 깊은 슬픔은 의료진의 정신건강에 큰 타격을 주고 있으며, 동시에 개인적인 문제 및 경험 또한 그들의 심리 상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응 활동의 핵심 요소인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프로그램은 트로스티아네츠 병원 직원들이 전쟁의 참상을 대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임상심리사들은 환자뿐만 아니라 보건부 의사들을 대상으로도 심리상담 세션을 진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미사일 포격 후에 대규모 사상자가 의료시설로 유입되는 경우를 포함해 보건부 의사들이 계속해서 긴급 상황에서 근무하고 있는 도네츠크(Donetsk)와 하르키우(Kharkiv) 등 최전선에 인접한 다른 지역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직원이 미콜라이우 코브자르치(Kobzartsi) 출신 환자를 위로하고 있다. 2023년 10월. ©Nuria Lopez Torres

전쟁 초기에 정부 의사들과 임상심리사들은 지칠 때까지 일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정신건강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극심한 피로와 번아웃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진을 대상으로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개시했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원하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진을 대상으로 지원을 보장하고자 했습니다.”_알리사 쿠시니로바(Alisa Kushnirova) / 헤르손(Kherson)•미콜라이우(Mykolaiv)•키로보흐라드(Kirovohrad) 지역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 팀 관리자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들은 의사들이 회복 및 휴식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개인적인 걱정을 해소하고, 무엇보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룹 및 개별 세션을 제공했다. 전쟁 중에 의사들은 점령과 실향, 부상, 폭력을 겪거나 미사일 공격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여 집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과 마주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과도하게 축적한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환자들로부터 모든 정보를 흡수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전부 처리하거나 짜낼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울거나 소리 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나약함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이러한 감정을 인식하고 해소하는 능력은 굉장한 강인함입니다."_알리사 쿠시니로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들은 각 환자들의 필요에 맞는 맞춤형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2022~2023년에만 26,324건의 개별 정신건강 상담을 제공했다. 그중 일부는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지역과 헤르손 및 도네츠크, 미콜라이우, 하르키우 내 교전 지역에 인접한 작은 마을들에서 의료 및 심리적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이동진료소에서 이루어졌다.
깨끗한 물 및 식량, 보건의료, 공급 처리 시설에 대한 기본적인 수요가 충족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종 정신건강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이런 지역에는 의료시설이 이미 파괴되어서 없고 의료진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고령자들은 이동이 어려워 지역을 떠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 큰 영향을 받는다. 걱정이 끊임없이 지속되면 심혈관 질환 및 불면증 등 건강 문제가 악화할 수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루한스크(Luhansk)에서 탈출한 한 남성이 우크라이나 당국이 관리하는 하르키우 지역 소재 전쟁 실향민 대피소에 있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그는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 후 러시아 군대에 징집될까 두려워 1년 반 동안 집을 떠날 수 없었다. 2023년 10월. ©Nuria Lopez Torres

이동진료소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들은 정신건강이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 환자에게 자주 설명한다. 또한 수면의 질을 향상하고 불안과 긴장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고,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스트레스 대처법을 알리기 위한 심리교육 훈련을 제공한다.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기본적인 방법 습득과 지원은 심혈관 및 정신 질환 발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심리교육 그룹 세션이나 개별 상담에서 전문가가 권장하는 기본적인 활동들은 환자들의 감정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장기적 조치가 필요한 더 복잡한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들은 2023년 10월 초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주의 흐로자(Hroza) 마을 소재 카페에서 발생한 미사일 공격의 생존자들에게 심리적 지원을 제공했다. 관련 당국과 국제연합(UN)에 따르면, 해당 포격으로 인해 330명이 살고 있는 해당 마을에서 15가구가 모두 가족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공격으로 다친 사람들이 병원으로 이송된 후,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들은 그들을 진료했습니다. 6명이 중증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일부는 머리를 다쳐서 두뇌 활동과 언어 기능이 손상됐어요. 그들은 모두 가족을 잃었습니다. 가족 한 명 또는 두 명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고, 친척을 15명까지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깊은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손을 잡아주고, 심지어는 같이 울어야 합니다. 또한 생존자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다루기도 하죠. 이들이 살아갈 힘을 찾고, 당장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_빅토리아 레페카(Victoria Lepekha) /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책임자

한 여성이 전쟁으로 부상을 당한 아들과 사망한 남편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자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가 안아주고 있다. 2023년 10월. ©Nuria Lopez Torres

슬픔과 상실을 겪은 환자들의 성공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지원이 중요하다. 가령 하르키우 지역에서 국경없는의사회는 요청에 따라 최전선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들에게 그룹 상담을 제공했다. 그룹 상담을 받는 7명의 여성들은 2023년 8월부터 최소 10번 이상 만나 각자의 경험과 아픔을 공유하고 전쟁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그중 한 명은 페르보마이스크(Pervomaiske) 출신 여성 나탈리아 루코바(Natalia Rukhova, 56세)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나탈리아는 상담 세션 중에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며 눈물을 흘린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상황이 끔찍하고 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가 좋지 않을까 봐 두려워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고,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_나탈리아 루코바

페르보마이스크 출신인 56세 여성 나탈리아 루코바. 2023년 10월. ©Nuria Lopez Torres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을 취하지 않으면, 전쟁의 여파에 대처할 수 없다는 두려움 자체가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안정한 정신 상태는 정서적 고통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신체적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령자들은 불면증 및 심혈관 질환에 걸릴 확률이 더 높고, 중년과 청년들은 두통 및 호르몬 문제, 월경 불순을 겪을 확률이 높다. 아동의 경우, 전쟁은 발달 지연, 언어 문제, 잦은 악몽 및 야뇨증을 초래하는 등 인지 능력에 악영향을 미친다. 일부 환자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기도 하며, 심지어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전투 사태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심리적 지원을 받고자 하는 의지가 2014년 전쟁이 시작됐을 때보다 훨씬 높아졌다. 전면적인 침공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임상심리사로부터 심리상담을 받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2년 동안 국경없는의사회는 정신건강 지원을 받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고, 임상심리사들을 처음 접한 아동, 청소년, 그들의 부모, 고령자들을 포함해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위안을 찾은 사람들이 서비스를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외 단체 및 정부 기관들의 옹호 활동 덕분에 우크라이나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사회적 낙인이 줄어들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며 심리적 긴장을 해소하려는 준비가 되어있다. 

이제 정신건강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 활동에 도움이 됩니다.”_인나 수조바(Inna Suzova) / 임상심리사


전면전 시작 이후, 국경없는의사회는 정신건강 지원을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대응 활동의 핵심 요소로 다뤄왔다.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팀은 정신건강 상담 및 심리교육 뿐 아니라 1차 의료지원도 제공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직원들은 의료진을 대상으로 정신과 치료 및 대규모 사상자 대응, 정신건강 교육을 포함한 2차 의료지원 교육을 제공한다. 빈니차(Vinnytsia)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의사회는 전쟁 관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겪는 사람들에게 심리치료 및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체르카시(Cherkasy)에서는 전쟁으로 다친 환자들을 위한 물리치료 프로젝트에 정신건강 지원을 포함하여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