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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요르단: 알-람사 병원에서 치료 중인 시리아 내전 피해자들의 증언

2013.12.18

엄마하고 같이 창문 너머로 밖을 보고 있었는데, 넘어져서 다쳤어요. 그리곤 사람들이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여기서 병원 사람들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엄마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할머니가 저랑 같이 있어요.

다리를 잃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하난(Hanan, 6세)

다리를 잃은 6세 소녀 하난

하난의 경우가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다리를 절단한 아이인데, 어머니가 없어요. 여기서 보낸 첫 이틀 동안 하난은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가족 중 아무도 아이 곁에 없고, 아이도 부모가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첫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는데, 자꾸 깨면서 그때마다 ‘내 다리, 내 다리!’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는 아이와 상담을 시작하고, 아이의 기분을 돌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 지, 아이가 병원에서 관심을 갖는 게 무엇인지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그림 그리길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하난의 치료 전략을 그림 그리기에서 찾기로 했습니다. 하난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병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그립니다. 예전에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려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지금은 다른 환자들이나 의료진과 대화를 나눕니다.

국경없는의사회 심리치료사 이브타심(Ibtasim)

 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어요. 또 제가 어떻게 다쳤는지도 알고 있죠. 집 근처에서 폭탄이 터졌어요. 유탄이 제가 서 있던 벽을 맞췄고, 저는 어디로 숨어야 할지 고민했어요. 전동기 뒤에 숨으려고 했는데 곧 터질 것 같았고, 차 뒤에 숨을까 했지만 차도 곧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둥 뒤에 숨었는데, 또 다른 폭탄이 기둥을 맞췄어요. 저는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전봇대에 끼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러 왔어요. 사람들이 저를 버스에 태워 야전병원에 데리고 가고 있었는데, 저희 아빠의 친구가 “이 아이는 죽었어요! 이 아이는 죽었어요!”라고 외쳤어요. 근데 저는 사람들의 말도, 모든 상황도 다 듣고 있었어요. 힘을 줘 목소리를 냈더니 사람들이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야전병원에 도착해서 정신을 잃었어요. 병원에서 제 손과 다리를 잘랐는데, 너무 아파서 마구 소리를 질렀어요.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치료가 필요해서 저를 요르단으로 보냈어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새로운 손과 발이 생길 때까지 요르단에 있다가 다시 시리아로 돌아갈 거에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이랑 폭발 때문에 무섭긴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요. 친구들도 가족들도 다 아직 거기 있거든요. 여기는 아무도 없어요. 제가 회복할 때까지만 아빠가 같이 계실거에요. 처음에 시리아를 떠날 때 저는 요르단에 오고 싶지 않아했는데, 아빠가 우리는 요르단에서 2~3주만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알고 보니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였어요. 3개월도 더 넘게 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시리아 다라에서 온 남자 아이(11세)

우리가 살던 집은 탱크 폭탄 2개로 폭격을 당했습니다. 그 집에는 다섯 가족이 살고 있었죠. 제 생각엔 당시 집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을 것 같아요. 제 딸 오르주완과 저만이 유일한 생존자일 겁니다. 저는 그 폭발로 아내와 10개월된 막내딸 야라(Yara)를 잃었어요.

 

폭탄이 터졌을 때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30분쯤 지나자 사람들이 와서 응급 처치를 해줬어요.
요르단에 올 때 저는 거의 의식이 없었습니다. 깨어났을 때는 다리가 잘려 있고 손과 손가락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죠. 응급 처치를 해주러 사람들이 왔을 때 저는 소리를 질러서 제가 살아있다고 알렸고, 제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잔해 속에서 저를 구해줬습니다. 하지만 요르단에 오는 길에도 계속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정말 힘들었어요.

 

병원에 왔는데,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사진 속 여자 아이가 혹시 제 아이냐고 물었어요. 제 딸 오르주완이었어요. 정말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신께서 제 목숨을 가져가 주셨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편이 이렇게 사는 것 보다 훨씬 편할 것 같아요. 이런 일을 겪었으니 앞으로는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게 될까요. 제가 아픈 것도 잊어버릴 만큼 기뻤지만, 도대체 우리 딸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예전부터 아내가 저에게 시리아를 떠나자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는데, 저는 상황이 좋아질 거라며 계속 반대했어요. 결국에 좋아진 건 하나도 없게 되었네요.

시리아 다라에서 온 오르주완(Orjuwan)의 아버지 (33세)

저는 어린 남동생을 제 무릎 위에 앉히고 어머니와 함께 집 뒤에 있었어요. 아버지가 오더니 ‘마을이 폭격을 당하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셨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말을 채 끝내시기도 전에 폭탄이 떨어졌어요. 그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어요. 포탄이 떨어지고 있지만 몸은 멀쩡하다고 생각했어요. 눈을 떠보니 옆에 있는 어머니가 심각하게 부상을 입은 모습이 보였어요. 다행히 남동생은 다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도 다쳤고 저는 등과 다리, 몸 전체에 파편이 박혔어요. 아버지는 도와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보러 왔을 때 저는 ‘걱정 마세요. 괜찮으니 놔두세요’라고 했습니다. 야전 병원에 가서 의사들이 치료를 하기 전까지는 제가 다친 줄도 모르고 있었죠. 전신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저를 요르단으로 이송하기로 결정했어요. 저는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야전 병원에서는 할 수 없는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이송시켰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요르단 알-람사 병원에, 아버지는 요르단의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남동생은 삼촌과 같이 시리아 다라에 남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이런 일에는 익숙해졌어요. 모든 시리아 사람들이 같은 일을 겪고 있습니다. 분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폭격 소리에 겁을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우리에겐 어느 정도 일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부상을 입고 나니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오전 11시에 부상을 입었고 요르단에 있는 이 병원에 온 건 오후 3시였어요. 이 곳 병원에서 저를 잘 돌봐 주셔서 마치 가족과 함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도 통증이 있고, 허리를 다쳤기 때문에 아직 앉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여기서 치료 받기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치료를 받고 난 뒤에 시리아로 돌아갈 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하고 제가 받는 치료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시리아에 있는 두 동생들이 이곳으로 올 수 있고, 아버지도 요르단에서 살기로 동의한다면 이 나라에 남을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시리아로 돌아가야겠죠.

 

파편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을 지금까지 4차례 받았습니다. 이곳에서는 안전한 느낌이 들어요.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고, 정신 건강 및 심리 치료 과정도 받고 있어요. 저는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했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 같긴 했지만, 확신이 없었거든요. 가족들은 처음에 이 사실을 저에게 숨기려고 하다가 결국 이야기를 하기로 했는데, 어머니의 부고는 정말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시리아 다라에서 온 여성(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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