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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가자지구 전쟁의 상처 회복 향한 기나긴 여정 속 아이들

2024.10.10

무균 병실의 작은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17세 카람(Karam)의 얼굴 옆으로 따뜻한 주황빛 선을 드리우면서 그의 왼쪽 뺨에 있는 하얀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르단 암만(Amman) 소재 국경없는의사회가 운영하는 병원에 머무는 카람은 천천히 일어나 앉은 자세로 오른손을 사용해 피부색 플라스틱 보조기를 왼쪽 팔 상단에 착용한다.

요르단 암만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카람. 2024년 8월. ©Moises Saman

우리가 죽어서 묻힐 때 여전히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사람들이 기도하는 소리와 우리가 묻힌 곳을 떠나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대요. 구급차에 타고 있을 때 과속방지턱을 지나면서 덜컹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눈을 뜰 수는 없었어요. 근데 아직 목소리는 들려와서 무서웠어요. 제가 이미 죽은 줄 알고요.”_카람

현지시각 2024년 2월 14일,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가자지구에 있던 카람의 자택이 파괴되고 7살짜리 여동생 지나(Ghina)와 부친 지아드(Ziad)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사망했다. 카람은 얼굴과 몸 전체에 화상 등 중상을 입었다.

그날 알 아크사(Al-Aqsa) 병원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중부 누세이라트(Nuseirat) 캠프 폭격 이후 사상자가 속출했다. 카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 팀은 그를 소생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시간 후, 알 아크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카람의 삼촌이 응급실에 들어와 조카에게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카람을 수술실로 급히 옮겼고, 국경없는의사회 직원들은 심폐소생술과 응급 수술을 집도해 카람의 목숨을 구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 임상심리사인 카람의 부친 지아드는 누세이라트에 있던 가족의 자택이 공격을 받던 당시 난민 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공습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알 아크사로 달려갔는데, 이웃들이 지나와 카람이 그곳으로 이송되었다는 얘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바닥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어요. 제 딸 지나는 얼굴과 어깨, 등에 1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죠.”_지아드

카람의 부친 지아드와 딸 지나. 2024년 8월. ©Moises Saman

지아드 자택에 떨어진 폭탄의 충격이 너무 심해 자택의 잔해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였다. 이 폭탄으로 지아드의 아내와 막내아들 모하메드(Mohammed), 러시아에서 치의학을 공부하는 도중 고향에 방문했다가 전쟁으로 가자지구에 발이 묶인 장남 타레크(Tareq)를 포함해 가족 13명이 사망했다.

카람이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제 아들인 걸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이라고 할만한 형태가 전혀 남아있질 않았죠. 옷도 남아있질 않았고요. 몸이 완전히 새까맣고요. 눈은 감겨 있었죠.”_지아드

카람을 안정시킨 후, 국경없는의사회와 알 아크사 병원 보건부 직원들은 중증 화상을 입은 그의 몸에 6차례에 걸쳐 성형수술을 집도했다. 카람은 7일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후 카람은 이집트 알 아리쉬(Al Arish) 소재 에미리트(Emirati) 수상 병원으로 대피한 후 암만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재건 수술 병원으로 옮겨져 현재 여동생을 비롯해 가자지구에서 의료 대피한 다른 환자들과 함께 종합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가자지구에 갇힌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전문 치료

암만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에서 주요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소수의 가자지구 출신 환자들은 가자지구 전역에 현존하는 막대한 수요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 수준이다.

우리는 암만의 재건 수술 병원에서 20년 가까이 이 지역 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해 온 경험을 통해, 일반적으로 전쟁 부상자 최대 4%가 재건 수술이 필요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의 경우 2023년 10월 7일 이후 부상자가 10만 명에 육박해 재건 수술과 종합적인 재활치료가 필요한 가자지구 주민은 최대 4천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_모이엔 마흐무드 샤이에프(Moeen Mahmood Shaief) / 국경없는의사회 요르단 현장 책임자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3년 10월 7일 전쟁 시작 이후 약 12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41,000명이 사망하고 95,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 중 최소 12,000명이 의료 대피가 필요한 상황이다(한국시간 2024년 9월 20일 기준).

하지만 부상 환자를 해외로 이송해 치료받게 하는 것은 상당히 길고 복잡한 절차이다. 이스라엘 당국의 요청 승인 기준이 불분명하고 환자들은 종종 응답을 받기까지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 의료 대피 요청의 약 60%가 거절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에 따르면 여기에는 부상당한 아동을 동반할 보호자의 대피 요청도 포함되어 있다.

8월에 보낸 의료 대피 요청 8건 중 보호자와 함께 이스라엘 당국의 승인을 받은 건 3건에 불과했습니다. 다음 차례에 또 신청을 하긴 할 테지만, 모든 환자를 승인하지 않을 게 100퍼센트 확실합니다. 아마 성인들의 가자지구 대피를 허용하는 게 못 미더운 것 같은데, 이게 아동들의 대피 요청까지 덩달아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진 못하죠.”_닥터 하니 이슬림(Dr. Hani Isleem) / 국경없는의사회 가자지구 의료 대피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국경없는의사회는 이스라엘 당국이 간병인을 포함해 전문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대피를 보장하고, 모든 환자와 간병인이 자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가자지구에 안전히 귀환할 수 있게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디마(Deema)와 하젬(Hazem)의 이야기

11세 디마와 디마의 가족은 2023년 10월 10일 이웃집에 공습이 가해졌을 때 가자시(Gaza City) 소재 자택에서 피신해 있었다. 당시 디마는 4층에서 어린 조카를 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디마는 4층에서 1층으로 떨어졌다.

자택이 무너져 부상을 입은 디마는 국경없는의사회 재건 수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2024년 8월. ©Moises Saman

잔해 밑은 칠흑같이 어두웠어요.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죠.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고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먼지와 돌이 얼굴을 덮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죠. 잔해 밑에서 손을 겨우 움직여 전선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제가 그곳에 있다는 신호를 보냈어요. 그때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리에 공기가 닿는 느낌이 들었고 곧 사람들이 저를 끌어내 구급차로 급히 옮겼던 기억이 나요. 지금까지도 제 어린 조카는 찾지 못했어요.”_디마

해당 공습으로 75명이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디마의 오빠인 14세 함자(Hamza)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마의 남동생 하젬은 밖에서 축구를 하던 중 건물이 무너지면서 중상을 입었다. 먼지가 걷히고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한 후, 디마와 하젬은 알시파(Al-Shifa)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어 응급 치료를 받았다.

가자시에서의 끊임없는 폭격으로 인해 디마와 하젬, 그들의 모친 에만(Eman)은 6개월 동안 알시파 병원에 머물며 병원 내부에 피신해 있던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함께 먹고, 자고, 치료를 받았다.

2024년 3월 18일, 이스라엘군이 알시파 병원을 포위하면서 병원 내부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대피가 이루어지는 혼란 속에서 디마는 어머니와 하젬과 떨어지게 되었고 그 둘은 남부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그 사이 디마는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었고, 가자시의 아스마 학교(Asma’a School)로 피신해 45일 동안 머물렀다.

우리는 50여 명의 가족들과 함께 한 교실에 머물렀어요. 식량과 물은 거의 없었고 전기와 가스도 없어서 불을 피워야 했죠. 저는 그때 어깨가 부러져서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걷는 것조차 어려웠어요.”_디마

5월 초, 디마는 마침내 남부로 이동할 수 있었고 라파(Rafah)에서 어머니와 하젬과 재회했다. 일주일 후, 이들은 이집트로 우선 대피했다가 암만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디마와 하젬은 재건 수술, 물리치료, 정신건강 지원을 계속 받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재건 수술 병원에서 하젬이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2024년 8월. ©Moises Saman

디마는 자택에 가해진 공격으로 오른쪽 대퇴골과 어깨에 골절상을 입었고 이마에도 상처를 입었다. 암만에서 디마는 다리에 삽입한 외부 고정 장치를 제거하기 전에 골절된 뼈가 치유될 수 있도록 매일 국경없는의사회 물리치료 팀과 함께 노력하고 있다. 디마는 훗날 사지 기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요르단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발목과 팔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수술과 물리치료 덕분에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가자지구에 전쟁이 계속되는 한 미래를 그리긴 어렵죠.”_디마

가자지구 전쟁 부상자들이 겪는 정신건강 문제

암만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팀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실업, 빈곤, 높은 중독률, 이전 전쟁으로 인한 장애 및 절단으로 인해 이미 우울증과 좌절감을 겪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 주민들의 정신건강은 급격히 악화했다.

가자지구에서 암만 병원으로 오는 환자 다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뿐만 아니라 급성 스트레스 증후군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환자들이 악몽과 플래시백(flashback, 예기치 못하게 과거 경험이 갑자기 떠오르는 현상)을 자주 겪을 뿐만 아니라 기분 저하, 불면증 및 기억 자체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자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_닥터 아흐마드 마흐무드 알 살렘(Dr. Ahmad Mahmoud Al Salem) / 암만 병원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임상심리사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주민 다수가 자택이 파괴되고 가족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삶을 뒤바꾸는 부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더 많은 가족과 친구들의 부고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 듣고 있다.

이건 일반적인 트라우마가 아닙니다. 거대하고 고통스러운 재앙이죠. 사람들은 이 모든 심리적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습니다.”_닥터 아흐마드 마흐무드 알 살렘

암만 소재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에서 활동하는 정신건강 팀은 급성 트라우마를 입은 환자들에게 종합적인 치료를 제공한다. 아이들에게 일대일 심리 지원은 물론 교육 활동과 작업 치료도 제공하여 자신감에 힘을 실어주고자 노력한다. 보다 심각한 경우에는 닥터 알 살렘에게 의뢰하여 정신과적 지원과 약물 치료를 받도록 한다.

닥터 알 살렘에 따르면 청소년은 특히 급성 스트레스와 삶을 뒤바꾸는 부상에 취약하다.

청소년들의 경우 이제 막 성격과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엄청난 불행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에서 자신들이 처한 위치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언젠가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돈을 벌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죠.”_닥터 아흐마드 마흐무드 알 살렘

닥터 알 살렘은 끔찍하고 삶을 뒤바꾸는 부상을 입은 청소년 환자들이 괴로운 기억과 정신적 트라우마 대처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회복하고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에도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아이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작업 치료를 하고 성장과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힘을 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_닥터 아흐마드 마흐무드 알 살렘

하나씩 차근차근

국경없는의사회 암만 병원에 있는 팔레스타인 청소년 환자들의 미래는 여전히 어둡고 불투명하다. 가자지구에는 아직 안전한 곳이 없으며, 언젠가는 가자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망은 암울하다. 모두가 집과 학교뿐만 아니라 가족도 잃었다.

디마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고 가족도 보고 싶지만, 전쟁이 끝나고 가자지구가 재건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

학교로 돌아가서 학업을 마치고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요. 가자지구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실향하거나 쫓겨나고 싶지 않아요. 그저 전쟁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죠.”_디마

자택에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지 5개월 만에 카람은 다시 걷고 왼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왼쪽 눈도 서서히 다시 떠지고 있다. 알 아크사 병원 의료진들이 카람이 생존할 가망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을 고려하면, 카람의 회복은 기적에 가깝다.

카람은 물리치료실에서 목발 대신 평행 지지대를 붙잡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미소를 짓는다. 전쟁 전에는 형 타레크처럼 치과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부상을 당한 이후로는 그게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씩 차근차근 하고 있어요. 우리는 전쟁이 끝나면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가자지구로 돌아갈 겁니다. 가자지구는 제가 지금까지의 삶을 살아온 고국이에요. 친구들도 그곳에 있죠.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와 있으니 차근차근 회복해 나가고 싶어요.”_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