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의사회는 태평양의 나우루 섬에서 11개월간 정신건강 지원을 하던 중, 2018년 10월 나우루 정부의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번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나우루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은 국경없는의사회가 고문 피해자 지원을 포함해 지금까지 진행한 현장 지원 프로그램에서 목격한 것 중 가장 심각한 경우에 속한다.
의학 보고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Indefinite Despair)》은 국경없는의사회가 나우루에서 수집한 의료 기록을 분석한 것으로, 사람들이 겪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지원했던 망명 신청자 및 난민 환자의 약 3분의 1이 자살 시도를 했고, 환자 12명은 ‘체념 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이라는 희귀 정신병 진단을 받았다. 나우루 주민의 정신건강 상태도 심각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치료한 나우루인 환자 절반가량은 정신병 치료가 필요했다.
보고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Indefinite Despair)》
국경없는의사회는 역외 심사 정책을 폐지하고 난민, 망명 신청자 전원을 나우루에서 즉각 대피시킬 것을 촉구한다. 난민 및 망명 신청자들은 가족과 함께 속히 영구적으로 재정착해 정신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나우루에 있는 내내 이런 상황에서는 망명 신청자와 난민을 치료하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 자체가 문제니까요. 정신건강을 대폭 개선할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을 섬에서 대피시켜 안전한 생활 환경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_ 로빈 오스로(Robyn Osrow) 박사 /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과의
배경
2017년 11월~2018년 10월, 국경없는의사회는 나우루 보건부의 공식 합의에 따라 난민, 망명 신청자, 나우루 주민을 대상으로 심리, 정신과 치료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난민 및 망명 신청자들은 호주 정부의 ‘역외 심사’(offshore processing) 정책에 따라 나우루 섬으로 이주된 사람들이었다. 배를 타고 호주에 들어오려던 이들은 호주의 정책에 따라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이주해 심사 기간 동안 기다려야 했다. 이들 중 다수는 5년 넘게 나우루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건강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018년 10월 5일, 나우루 정부는 돌연 국경없는의사회 서비스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며 24시간 안에 활동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갑작스런 활동 중단으로 국경없는의사회는 지속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환자 수백 명을 남겨 두고 섬을 떠나야만 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
11개월간 지원한 사항:
- 국경없는의사회는 285명의 정신건강 상태를 평가했고 총 1,847회의 추후 지원을 실시했다.
- 285명 가운데 73%는 난민과 망명 신청자, 22%는 나우루 주민이었다. (나머지는 외국인 노동자 혹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 난민과 망명 신청자를 위한 지원이 1,526회, 나우루 주민을 위한 지원이 591회,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지원이 4회로 집계되었다.
또한 국경없는의사회는 정신건강 장애를 치료하는 현지 역량을 구축하는 데에도 힘썼으며, 정신건강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고 정신질환과 연관된 낙인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만난 환자들
- 연령: 1세 미만~74세 (평균 연령 32세)
- 전체 환자의 19% — 18세 미만
- 성비: 여성 157명 / 남성 128명
- 난민 및 망명 신청자 환자 중 난민이 193명(93%), 망명 신청자가 15명(7%)
- 난민 및 망명 신청자 환자 출신: 이란 출신(76%)이 가장 많았고 소말리아(5%), 미얀마/로힝야(3%)가 뒤를 이음
정신건강 위기 실태
환자의 정신질환 정도는 ‘전반적 기능평가 척도’(GAF)로 평가했다. GAF는 환자의 증상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측정 결과는 최저 1점부터 최대 100점까지의 점수로 나타내며, 70점 이상이면 건강한 상태로 간주한다.
국경없는의사회 환자들은 나우루 주민, 난민, 망명 신청자 그룹에 관계없이 모두 GAF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얻었다. 나우루 주민 환자의 경우 1차 평가에서 GAF 평균 점수는 35점으로, 정신병이 있으나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난민, 망명 신청자 그룹에서 GAF 평균 점수는 40점이었다. 중증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국경없는의사회 타 프로젝트에서 GAF 평균 점수는 60점으로 나타난다.
난민, 망명 신청자 환자
국경없는의사회가 나우루에서 치료한 난민, 망명 신청자 환자 208명 가운데 124명(60%)은 자살 생각을 했고 63명(30%)는 자살 시도를 했다. 9세 정도의 어린 아동마저 자살 생각, 자해, 자살 시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치료한 난민, 망명 신청자 환자 208명 가운데 약 3분의 2(62%)는 중등도 혹은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 밖의 주된 증상은 불안 장애(25%)였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18%)가 뒤를 이었다.
성인 및 아동 환자 12명(6%)는 체념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이 증상은 반혼수 상태에서 나타나는 희귀한 정신병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
나우루에서 겪는 또 다른 폭력과 학대
국경없는의사회가 나우루에서 치료한 망명 신청자, 난민 환자들은 몹시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전체의 75%가 고국에서 혹은 이주 도중 전투와 구금 같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고 했다.
지금껏 겪은 일도 충격적이었으나, 환자들의 삶을 더욱 짓누르는 것은 기약 없는 호주 정부의 정책이었다. 난민, 망명 신청자 환자 중 65%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고, 이들은 자살 충동에 빠지거나 주요 정신과 질환에 걸릴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난민, 망명 신청자 환자의 23%는 나우루에서 폭력적인 일을 당했다고 말했으며, 국경없는의사회 기록에 따르면 이 환자들은 입원 치료가 필요했으나 현지에서는 병상이 부족해 그러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 난민, 망명 신청자 환자 23명(11%)는 이민 당국, 호주 국경군 등 현지 당국이 가하는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당했다고 말했다.
국경없는의사회 분석 결과, 망명 신청자 및 난민 환자의 3분의 1 이상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다. 몇몇 식구가 치료를 위해 나우루에서 이송되면서 (이송된 난민들이 나우루로 돌아가도록 호주 정부가 사용한 책략) 가족들과 격리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살 충동을 느낄 확률이 40% 높았다.
나우루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정신건강 팀 ⓒSean Brokenshire/MSF
나우루 주민 환자
국경없는의사회의 치료를 받은 나우루 주민 환자들도 전반적으로 정신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절반에 가까운 64명(47%)은 정신병을 앓았다. 그 외에 중등도 및 중증 우울 환자(16%), 약물 남용 환자(9%)가 있었다. 17명(27%)은 정신건강 지원을 받을 곳이 없어, 국경없는의사회가 오기 전까지 의료적으로 방치되어 있던 것으로 보였다. 나우루 주민 환자의 약 3분의 1은 가정 폭력, 성폭력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우루의 정신건강 지원 현황
국경없는의사회 조사 결과, 나우루 의료 시스템은 지금의 정신건강 위기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나타났다. 나우루 공립병원에는 입원시설이 없고, 정신건강을 담당하는 의료진도 부족하다.
국경없는의사회가 건강 홍보 측면을 살펴본 결과, 정신건강 부문은 심한 낙인이 찍혀 있었고 사람들도 이 부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난민뿐 아니라 나우루 주민 환자들에 대한 지원도 열악했다.
호주 정부와의 계약 아래 진행되는 의료 서비스도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정신과 입원병동 침상도 부족하고 의료진 이직률도 높다.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이런 시설들이 가혹한 역외 심사 정책 담당자들과 한통속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인식 때문에 서로를 믿는 치료 관계를 수립하기가 어려웠다.
치료를 위한 이송
국경없는의사회가 나우루에서 난민 및 망명 신청자, 나우루 주민을 치료하던 당시, 공식 의료 대피 절차(OMR)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환자 이송이 필요하다는 권고가 있더라도 섬에 그대로 머물게 하는 등, OMR이 제 기능을 다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국경없는의사회도 OMR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OMR에 따라 이송 승인을 받았던 유일한 환자—나우루 주민—조차 결국 이송에는 실패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나우루에서 11개월간 활동하며 치료했던 난민과 망명 신청자 환자들은 의료적 목적, 주로 정신과 치료를 위해 나우루 섬에서 이송되었다. 대개 환자들이 법적 행동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이후에야 호주 정부가 이송을 해주었다.
나우루 전경 ⓒMSF
의료 지원 방해
국경없는의사회가 나우루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당시, 208명의 환자들은 우리의 치료를 받던 상태였다. 24시간 안에 떠나라는 갑작스런 추방 명령으로, 우리는 취약한 환자들을 다른 정신건강 지원 시설에 인계할 틈도 없었고, 결국 치료는 중단되었다. 현재 나우루에서 독립적으로 의료를 지원하는 주체는 없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나우루 주민, 난민, 망명 신청자 등 남겨 두고 온 환자들의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있다.
결론
국경없는의사회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나우루는 지금 정신건강 위기 한가운데 놓여 있다. 나우루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은 국경없는의사회가 고문 피해자 지원을 포함해 지금까지 진행한 현장 지원 프로그램에서 목격한 것 중 가장 심각한 경우에 속한다.
또한 국경없는의사회의 이번 보고서는 나우루에서 나타나는 정신건강 장애가 호주의 역외 심사 정책과 연관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난민 및 망명 신청자들은 아무런 기약 없이 5년 넘게 나우루에 머물러 왔다. 분명한 시한을 듣지 못한 난민과 망명 신청자 사이에는 절망감이 팽배하다. 사람들 대다수는 호주의 재정착 정책이 모호하고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다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감이 없다고 느낀다. 이러한 생각이 결국 정신과 질환으로 이어진 것이다. 치료를 위해 가족들과 떨어지게 된 경우에도 심리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결과는 모두 예측할 수 있는 비극이다. 기약 없는 구금과 가족 분리가 정신건강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기존의 정신건강 연구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충격적이게도, 국경없는의사회가 치료한 나우루 환자 대다수(55%)는 비록 상태가 심각했더라도 국경없는의사회의 치료 속에 GAF 점수가 높아졌다. 반면, 난민 및 망명 신청자 환자들은 같은 치료를 받았음에도 단 11%만이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정신건강 지원은 일시적인 증상 완화만 가져올 뿐, 지금처럼 사람들이 나우루에 무기한 갇혀 있다면 그 무엇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데, 이번 보고서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입증해 준다. 이에 국경없는의사회는, 더 큰 피해를 막을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정신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나우루에 있는 난민과 망명 신청자 전원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