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되며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민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특히 노인, 장애인, 만성질환자 등 피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교전 지역에 발이 묶인 채 생활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남겨진’ 이들을 위해 의료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나탈리 로버츠(Natalie Roberts)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이들이 처한 심각한 상황에 대해 전했다.
3월 초, 국경없는의사회 팀이 키이우(Kyiv) 지역에 도착했을 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피난행렬이 이어졌습니다. 키이우로 들어가는 길에서 수많은 차량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러시아 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앞 유리에 ‘아이들이 타고 있어요’라고 적어 놓은 차가 많았습니다. 피난민은 반려동물과 함께 소지품을 가득 싣고 가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울려 퍼지는 공습경보와 여기저기 보이는 검문소, 흩날리는 눈이 아니었다면 긴 휴가 행렬이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습니다.
곧 피난을 가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이, 여성, 아동, 차량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우크라이나 서부나 인접국으로 피난할 수 있지만 고령자, 장애인, 정신질환이나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는 떠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현재 러시아가 점령하고 지역에는 피난하지 못한 이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한 달 동안 부차(Bucha)는 그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독거노인이나 환자, 장애가 있는 사람은 피난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일부는 지하실로 피난했지만, 거동이 불편해 집 밖을 벗어나기 힘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극심한 폭력을 겪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밖에 나가면 총격이나 탱크 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전기, 연료, 식수 등의 물자 제공은 중단되었고 병원 및 보건시설은 파괴되거나 무너졌습니다. 현지 의료진이 대거 탈출했기 때문에 의료서비스 또한 중단된 상태입니다. 저체온증이나 스트레스 환자가 증가하고 만성질환 치료 접근성이 차단되어 심장마비나 뇌졸중 환자 또한 증가했습니다. 의료 종사자들에 따르면 심장병이나 만성질환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전쟁의 직접적 영향으로 발생한 사망자보다 많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우크라이나가 탈환한 지역에서 현지 의료진과 보건당국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환자를 파스티우(Fastiv) 병원으로 이송하기 전 안정화시키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병원이 늘어난 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지원하고 물리치료와 심리치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현재 접근이 가능한 키이우 북부와 체르니히우(Chernihv)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키이우 남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의 빠른 진격을 염려한 수많은 주민이 피난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도 환자나 고령자 등 취약인구는 남아야 했습니다. 병원과 보건시설은 부상자에 대비해 비응급성 치료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1차 의료서비스 등 전반적인 보건의료 접근성이 심각하게 축소됐습니다. 약국은 문을 닫았거나 필수 의약품 재고가 떨어진 상태입니다. 알코올 판매가 금지되어 알코올중독자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극심한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사들은 연료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자전거를 타고 환자를 방문합니다. 하지만 수시로 발동되는 통행금지령과 이동 제한, 수많은 검문소로 인해 환자 방문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회복지사들은 병원이 비어 있는 이유가 사실상 환자가 집에서 나올 수조차 없기 때문임을 전했습니다.
신부전이나 암 등의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는 질병으로 인해 집에 머물고 있으며 투석이나 화학요법 치료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서부나 인접국에 가서도 치료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면 이들은 섣불리 피난할 수 없고 보통 가족도 함께 고립됩니다. 치매 환자와 간병인을 지원하는 현지 단체 네자부트니(Nezabutni) 재단 책임자에 의하면 폭격이 심한 지역에서 정신질환자와 가족은 경보가 울리더라도 몸을 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환자에게 보호자의 대피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동안 환자를 떠나지 않는 간병인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충분히 피난할 수 있었지만, 환자를 돕기 위해 남아있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회복지사는 대부분 가족이 있는 중년 여성인데 집에 고립된 사람을 확인하고 방문하기 위해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단체도 약국에서 의약품을 구해 식료품 및 필수품 등과 함께 고립된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로원 직원들은 최전선이 점점 가까워질까봐 두려움에 떨면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파스티우에서는 자원봉사자 덕분에 러시아군이 점령한 마카리우와 보로디안카에서 온 피난민을 받아줬습니다. 현재는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이들을 대피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민들이 자원해서 결집한 모습은 체르니히우(Chernihiv), 하르키우(Kharkiv) 및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같은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크라이나 인구 약 900만 명이 60세 이상이며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많은 이들이 고립되어 있습니다. 고립된 고령인 및 간병인을 위한 지원이 시급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최전선 인근의 고령자와 장애인을 더 안전한 지역의 거처로 대피시키는 일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부차와 같은 지역에서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도 거처에 수용이 가능합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사회복지 단체와 공조하여 이러한 피난처를 설치하고 지원하는 등 의료 대피를 지원할 수도 있습니다. 만성질환자가 충분한 의약품을 받을 수 있도록 자원봉사가 운영하는 약국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국경없는의사회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원격진료와 의료적 지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네자부트니 재단이 제안한 플랫폼을 경제적, 기술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치매 환자는 플랫폼을 통해 원격진료 및 지원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같은 긴급 의료 구호단체는 민첩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급변하는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장기적 필요가 대두하고 있는 가운데 국경없는의사회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전쟁에 남겨진 가장 취약한 이들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