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정상훈
포지션: 의사 (Medical Doctor)
파견 국가: 수단
활동 지역: 옴두르만(Omdurman)
활동 기간: 2022년 10월 – 2023년 3월
*이 이야기는 2023년 4월 수단 내 무력분쟁이 격화되기 이전 국경없는의사회 수단 활동 상황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단 옴두르만 움바다 행정구역내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에서 진료중인 정상훈 활동가 ©정상훈/MSF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저는 수단의 옴두르만이라는 대도시에서 차로 40~50분 정도 걸리는 변두리 지역인 움바다(Um Bada)에 위치한 4개의 진료소에서 주로 일했습니다. 수단의 수도는 카르툼이지만, 카르툼과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같은 수도권 도시인 옴두르만에 실제 거주 인구가 더 많습니다.
수단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2017년만 해도 수단 1인당 국내총생산이 3,188달러였는데 최근 수년간 불안정한 정치 국면이 계속되고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후퇴했다고 해요. 2021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751달러로 전보다 무려 4분의 1토막으로 줄어들었습니다(출처: 세계은행).
경제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고통받는 사람들은 빈곤한 사람들이죠. 대도시에서는 빈부격차도 심해졌고요. 유엔 세계식량계획에 따르면, 인구 4,500만 명인 수단에서 식량 위기를 겪는 인구는 1,5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출처: 세계식량계획). 국경없는의사회는 수단에서 코로나19 긴급 대응도 하다가 움바다의 열악한 상황을 보고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서도 진료소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는 빈민도 많고, 인근 남수단이나 에티오피아 분쟁지역에서 넘어온 난민도 많습니다.
진료소에서는 1차 진료를 하고, 응급환자가 오면 국공립인 옴두르만 수련 병원으로 전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진료의사로서 진료도 하고, 현지 의사들에게 기술적 조언을 하는 일종의 자문(technical advisor) 역할도 했죠.
활동 지역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느낀 의료보건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어떤 환자가 많았나요?
4개 진료소에서 모두, 거의 대부분이 아동 환자였습니다. 응급환자 중에서는 폐렴 환자들이 가장 많았어요. 열에 들뜬 채 숨을 헐떡거리고 갈비뼈 사이 살이 움푹움푹 들어가는 어린 아기들이요. ‘우리 진료소가 없었으면 이 아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한 순간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면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퇴원할 때까지 치료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동 환자를 진찰 중인 정상훈 활동가 ©정상훈/MSF
폐렴과 함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역시 영양실조였습니다. 저희 진료소를 방문한 어린이 환자의 약 20%는 중등도 또는 중증의 급성 영양실조였어요. 지금도 한 아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2kg 정도 되는 한 아기는 위 팔둘레가 성인 손가락 두 개 합친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죠. 보호자에게 물으니 지난 한달간 설사를 계속했다는 겁니다. 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왜 이 아기를 좀 더 일찍 데려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영양실조가 그렇게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텐데요. 전 묻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왜 더 일찍 데려오지 않으셨어요?” 그랬더니 “여행을 해야했다”고 짧게 대답하시더군요. 더는 꼬치꼬치 캐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국내실향민(*무력 분쟁, 재해 등의 영향을 받거나 피해를 피하기 위해 집을 강제적으로 떠나야 한 사람들)으로서 이주를 자주 해야하는 사정이 있었을지 모르죠. 또 그곳에서는 아이들을 평균 4명 이상은 낳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이들을 일일이 돌볼 겨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식량 상황도 불안정하고, 엄마들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면 모유가 원활하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요. 영양실조에 폐렴이나 말라리아가 동반되면 상태는 더욱 위험해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수단에서는 드물지 않은 겸상 적혈구 빈혈증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몸에 산소를 공급하는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변형되는 병인데요. 심한 빈혈이 생기고 면역력이 떨어져 폐렴 같은 감염병에 잘 걸리게 됩니다. 근본적 치료법은 골수이식인데, 이게 무척 비쌉니다. 그래서 저소득국에서는 보통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하게 되는 병입니다. 이것은 평생 관리해야 하는 만성질환이기도 해서, 급성질환을 지원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에서는 겸상 적혈구 빈혈증 아동 환자들을 제대로 도울 수 없었습니다. 낫 모양 혈구가 아동 환자들의 혈관을 막거나 비장에 쌓여서 복부가 부풀어오르는 등 응급 상황이 오게 되면 병원으로 보내 응급 치료를 받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몇 번 만났다고 그 환자들이 저에게 아는 척을 하기도 했거든요. 그 아이들의 유난히 창백한 눈을 잊을 수가 없네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셨나요? 보람있던 순간은요?
오전 9시에 진료소 앞에 도착하면 족히 200명은 되는 사람들이 이미 마당에 앉아 저를 바라봅니다. 아동 환자가 100명, 보호자로 온 엄마가 100명. 아침마다 그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갈 때,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죠. 그래서 중간에 화장실 갈 시간, 휴식시간도 없을 만큼 진료시간은 바빴습니다. 아기와 엄마들이 몇 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진료가 모두 끝나고 운동장이 텅 비면 무척 홀가분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로서 그냥 두면 생명이 위험했을 영양실조나 폐렴에 걸린 아이들이 나중에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게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고요.
아동 환자를 진료중인 정상훈 활동가와 활짝 웃는 아동 보호자 ©정상훈/MSF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의사로서 다른 수단 동료 의사들에게 기술적 조언을 할 때 굳어진 진료 문화를 바꿔보려고 노력했거든요. 의사와 환자 관계가 무척 권위적인 경향이 남아있어, 진단이나 처방 내용이 환자에게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통역을 통해서나마 최대한 충실하게 환자들에게 이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는데요. 어느날 수단인 간호사가 제게 오더니 엄마들이 특히 저한테 진료를 받고 싶어한다고, ‘저 의사는 설명을 자세히 해준다’는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그 일도 기뻤습니다. 그곳 사람들과 순수하게 감정적 연결이 됐다고 느낀 거니까요.
그렇다면 활동하면서 느끼신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빈곤입니다. 저희가 진료소에서 중증 폐렴 아동 환자를 옴두르만 병원으로 이송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 기가 차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아기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병원에 산소통이 다 떨어져서’였어요. 어려운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빈곤에 가장 쉽게 타격을 받는 집단은 어린이들이거든요.
빈곤과 영양실조라는 게 참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문제입니다. 돈을 주면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수단은 보수적이고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며 조혼 풍습이 남아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이혼이 꽤 많고, 보통 남편들의 일방적 통보로 이혼이 이뤄집니다. 그럼 사실상 남편에게 생계를 의존하던 여성들은 이제 무엇을 먹으며 아이를 돌봅니까?
결혼을 한 상태에서도 아이들을 돌보는 건 주로 여성인데, 결정은 남성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십 년전 한국의 시골 마을들에서처럼, 작은 공동체들이 잘못된 종교적/문화적 믿음을 목숨처럼 공유하고 있으면 특히 문제가 됩니다.
일례로 제 옆 진료실 의사가 환자를 봐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진료소에 오는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어린이 영양실조 환자들보다는 큰, 5-6살 정도는 되어보이는, 하지만 몸에는 뼈밖에 남지 않은 환자였어요. 중증 영양실조와 호흡부전이 의심되어 국경없는의사회 차량으로 전원 병원까지 즉시 이송했습니다. 나중에 이송 차량에 같이 타고 갔던 간호사에게 아이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그 바로 전 주에 이미 폐렴과 영양실조로 입원했던 환자인데 부모가 밤에 몰래 병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버렸었다는 겁니다.한국에도 예전에 가끔 있던 잘못된 믿음, 즉 ‘산소 마스크를 한번 쓰면 못 빼게 된다’, ‘산소는 독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부모가 애를 살리겠다고 벌인 일이었죠. 당연히 며칠만에 아이의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국경없는의사회 진료소에 온 건데, 안타깝게도 저희가 병원에 다시 보낸 그 다음날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혈을 하면 안된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진료가 끝난 시간에 헤모글로빈 수치가 겨우 3.5mg/dl(2살 어린이의 경우 11 mg/dl 이상이 정상이다)인 환자가 왔었는데요. 우리나라 기준으로 이 수치가 6mg/dl 이하면 수혈을 해야하니까, 사실상 생명이 위험했다는 뜻입니다. 보호자인 엄마가 진료가 끝난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온 거라 뒤늦게 전원 이송 차량을 대기시킨다고 퇴근 준비하다가 다시 바빠졌는데, 갑자기 그 엄마가 수혈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진료소를 나서 돌아가면서 한다는 말이, “집에 가서 남편한테 얘기해보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다행히 집에 가면서 남편과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10분만에 다시 가던 길을 뒤돌아오길래 다시 서둘러 준비해서 결국 환자를 이송한 기억이 있습니다. 단순히 빈곤 지역이라고 재정적 지원만 해서는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루 일과는 어땠나요?
옴두르만의 하루는 아침 8시에 시작합니다. 8시에 옴두르만 시내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실 앞에서 다같이 만나서 차량에 올라탔습니다. 4-50분간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타나는 도로를 따라 진료소로 출근을 합니다.
10-12월 기간에는 40도가 넘는 기온이 계속돼 태양이 쏟아내는 광자(光子)에 얻어맞아 짜부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진료소에는 전기가 안 들어와서 에어컨은 커녕 팬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잠깐 일어설 틈도 없이 바쁘다보니 위아래 옷이 흥건해질 정도로 땀에 젖었죠.
출퇴근길에도 제게 보이는 건 모래 뿐이라 처음에는 수단 인구 90%가 농업에 종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움바다라는 곳도 초록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지역이라 하루 일과가 끝나면 머리카락이 모래를 하도 뒤집어써서 철사처럼 뻣뻣해지곤 했습니다.
활동가의 출퇴근길 풍경 ©정상훈/MSF
움바다 진료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날 9시부터 3시 무렵까지 휴식 시간 없이 진료가 계속되길래 당황했습니다. 그날 도시락을 못 챙겨갔는데, 보통 점심시간인 오후 12-1시에 아무도 밥 먹자는 말을 안하는 거예요(웃음). 처음엔 물통도 안 가져가서 물도 못 마셨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요즘 수단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 정도만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첫 끼인 아침을 10-12시 사이에 잠깐 각자 알아서 빠져나가 간단히 먹고 들어오고요. 보통은 3시 정도면 진료가 끝나서 다시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4시가 됩니다. 그럼 수단 직원들은 퇴근을 하고 관리자들은 좀더 사무실에 남아서 업무를 보다가 퇴근했습니다.
수단 동료들이 가끔 "수단에 대한 인상이 어떠냐?"고 물었어요. 사실 저에겐 ‘건조한 모래땅’이라는 인상 뿐이었습니다. 수도도 전깃줄도 없이 드문드문 놓인 단층 흙벽돌집들이 하늘과 모래땅 사이 풍경의 전부인 곳이었어요. 저는 숙소와 사무실, 진료소,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을 사러가는 슈퍼마켓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거든요.
활동하신 지역의 환자들에게 국경없는의사회는 어떤 의미일까요?
국경없는의사회는 어떤 분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생명줄입니다. 일단 비용에 대한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산전·산후 관리와 보건증진 활동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는 수단 정부의 공공 의료체계나 현지 민간 의료체계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을 국경없는의사회가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다보니, 안타까운 사연도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만성질환의 경우 치료나 수술 제공이 어려운 경우가 그렇고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로서 자부심도 물론 있지만, 결국 국경없는의사회도 제한된 자원을 가진 하나의 단체이고, 하나의 프로젝트가 해당 지역사회의 모든 건강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안타까운 사연이 생기는 건 어느 정도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한편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보건증진 활동가(health promoter)들이 지역사회에서 인지제고 활동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체류하는 동안에도 뎅기열이 유행하고, 남수단에서는 콜레라가 유행하기 시작해서 예방적 차원의 교육이 많이 이뤄졌습니다. 그런 활동들을 보면서, 의사들이 살리는 목숨도 많지만, 그런 보건증진 활동이 살리는 목숨도 많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공유되고 전수된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 그것들은 국경없는의사회가 현장을 떠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활동가님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요?
원래는 짧은 휴가를 마치고 바로 다른 현장으로 복귀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이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낼 때 곁에 있지 못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생각입니다. 나중에는 물론 다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로서 현장에 나갈 생각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후원자님들께 건네고 싶은 한 마디가 있으신가요?
이미 많은 후원자님께서 국경없는의사회와 함께하고 계시지만, 국경없는의사회가 현장에서의 활동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실제로 살리고 있는지 활동가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 받으시고, 더욱 충만하고 따듯한 감정을 느끼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후원자분들 덕분에 제가 거기에 가서 일할 수 있었던 거니까요.
수단 어린이와 함께한 정상훈 활동가 ©정상훈/M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