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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남수단에서 온 편지 – 간호사 박선영

2016.04.21

수술전문 간호사 박선영 활동가는 처음으로 지난해 2월부터 6개월 동안 남수단 랑키엔에서 프로젝트에 참여 했습니다.

 환자 중에 2살 여자 아기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다리 한쪽에 큰 화상을 입었어요. 화상 당한 자리에 피부가 없다 보니까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에도 잘 걷지 못했어요. 그러다 3개월쯤 지난 뒤 아기 엄마가 저를 불렀어요.

어떤 일일까 가 보았는데, 아이가 엄마를 잡고 앞으로 걸어오는 거에요! 너무나 감동이었어요. 걷지 못해서 다른 또래 아이들은 뛰어 다니는데 그 아이는 보고 있기만 했거든요.”

 

 

 

남수단에서 국경없는의사회는 끊임없는 내전으로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한 의료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었던 랑키엔은 그래도 남수단 내 다른 긴급 프로젝트보다는 체계적으로 병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술실, 외과병동, 내과병동, 중환자실, 영양관리병동, 모자병동, 분만실, 흑열병 외래병동, 그리고 결핵과 HIV/AIDS 병동 등으로 이루어져 규모도 비교적 크고 병원 안에서 일하는 직원도 많습니다. 물론 병동이 텐트로 지어져 있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병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요. 병동은 항상 붐비고 외래를 찾는 환자들은 하루에 몇 백 명에 달합니다.

병원 안에는 총상환자가 많았는데 그 중 3분의 1은 10대 혹은 그보다 어린 아이들입니다. 총상환자 외에도 화상, 뱀에 물리거나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작은 상처가 감염되어 오는 소아환자도 많습니다. 내전 속에서 상처입고 혹은 이미 불구가 된 채 병원 안에서 전쟁놀이를 하기도 하고, 붕대를 감은 채로 뛰어 놀면서 치료를 기다립니다. 17살에 총상으로 오른팔을 잃은 아이, 2살에 사고로 전신화상을 입은 아이, 뱀에 물려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절단한 8살 소녀… 그 외에 수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던 많은 아이들이 아직 생생합니다.

 

아동 화상 환자를 치료하는 박선영 간호사

 

보통 일과는 일요일을 제외한 6일동안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합니다. 인수인계와 안전에 관한 짧은 직원 회의로 오전 근무를 시작합니다. 12-2시 사이 시간 날 때 점심을 먹고는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후에(정말 더워서 체력적으로 힘듭니다) 오후근무를 합니다. 끝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은 5시에 일반근무가 끝납니다. 그 이후의 시간은 각 부서의 당직근무자가 담당합니다. 돌아가면서 당직근무를 서게 되고, 근무자는 무전기를 항시 가지고 있으면서 현지직원의 도움요청에 응하기도 하고 입원관리 및 응급환자를 받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단지 의료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절반 이상은 식수 및 위생, 물류이송, 안전 등을 담당하는 비의료인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모두의 생활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면서 지켜야 했던 가장 기본적이고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동료 및 직원들과 의사소통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지에서의 생활은 흡사 섬과도 같습니다. 안전문제 때문에 자유롭게 밖에 드나들 수 없고 외출할 때는 무전기를 지참하고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에게 출입을 보고해야 합니다. 각오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안전하다고 느꼈던 건, 국경없는의사회가 이렇게 안전에 최우선으로 민감하게 대처했기 때문이겠지요. 안전 수칙을 지키면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상 시장에 나가서 구경을 해도 되고 운동을 해도 됩니다. 주말이면 직원과 현지인간에 축구경기가 열리기도 하고 다른 구호단체 사람들과 만나 게임을 하거나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주중에는 다들 바쁘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함께 요리하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동료들에게 계란찜, 김밥, 김치, 참치전 등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랑키엔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과 함께

제가 있던 2월부터 8월까지는 건기와 우기를 경험할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3월은 가장 기온이 높은 달이고, 5월이후부터는 우기가 시작됩니다. 건기에는 약 40도에 이르는 뜨거운 기온과 엄청난 건조함이 찾아옵니다. 습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코 속이 바짝바짝 마르고, 선풍기뿐인 방안에서 더위와 싸우며 잠이 들었습니다. 우기에는 무릎아래까지 차오르도록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곤충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수술실이 건물 안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비가 많이 오면 수술실로 들어오는 비를 퍼내고, 청소하는데 오후를 온통 보내기도 했습니다.   

지내는 동안 기쁘고 행복했던 적도 있지만 분명 어려웠던 날도 있었습니다. 동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문제점 때문에 설득해야 했고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현지 직원의 대부분은 의료지식이 없어서 교육을 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환자를 생각할 수 있는 의료인력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어려웠습니다. 외로움 혹은 이별에 어려움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혼자라고 느끼는 외로움, 그리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활동 기간을 마치고 떠나면 힘든 마음을 달래는 건 고스란히 각자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활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입장이었습니다. 적잖은 외로움도 느꼈지만 감사한 일도 얼마나 많았던지요. 후련함보다는 아쉬움으로 마무리 지었던 내 첫 활동,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