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비 응캄파랄라(Thembi Ngcamphalala)는 스와질란드(Swaziland) 외딴 지역인 시셀웨니(Shiselweni)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에이즈(HIV/AIDS) 환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는 국경없는의사회의 ‘전문 환자’이다. 밝고 활기찬 여성인 응캄파랄라(Ngcamphala)는 드와레니(Dwaleni)마을의 작은 병원 복도를 열심히 오가며 맡은 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2001년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 당시 난 25세였고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체중도 많이 줄었으며 구토, 발진이 심했고 이상한 말도 계속 중얼거렸다. 온 몸이 아팠으며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할 수 가 없었다.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 없었다.
결국 오빠가 스와질란드 최대 도시인 만지니(Manzini)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고 폐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들이 내 폐에서 4리터의 물을 빼냈고 에이즈(HIV) 테스트를 받겠냐고 물었다. 당시 에이즈라는 병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나는 “그게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평생 작은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을 밖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테스트 결과, 양성이었다. 에이즈 단계를 알려주는 CD4 수치는 상당히 낮은 3으로 나왔는데 면역체계가 거의 기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좋은 상담을 즉시 받을 수 있었다. 의사들은 치료 가능성에 대해 알려주었고 나는 바로 동의했다. 2002년 1월 26일, 에이즈(HIV) 치료제인 항레트로바이러스(antiretrovirals) 치료를 시작했다.
당시 에이즈(HIV)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양성반응을 받은 사람들은 정상인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나는 간병해준 오빠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지나치게 말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했으며 악수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2주 후, 휠체어 없이 지팡이만 있으면 걸을 수 있었다. 다리로 다시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1년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관해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당시 내 고모와 자매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스와질란드에서 사람들은 에이즈를 “세계적인 살인마”라고, 야생동물을 칭하듯이 불렀는데 이 표현에서 그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나와 음식도 함께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게 큰 상처를 준 일이 있다. 사촌과 함께 외출을 했는데 날씨가 추워져서 사촌이 자신의 재킷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되돌려주자 그는 감염될까 두려워서 옷을 불태워버렸다. 사람들이 에이즈(HIV)와 그 치료 가능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에이즈(HIV) 테스트와 치료가 내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 라고 결심했다.
2004년, 시셀웨니 지역 수도 은랑가노(Nhlangano)에서 에이즈(HIV/AIDS) 환자를 도와주는 기구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나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와 이를 통해서 어떤 효과를 봤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2009년 은랑가노에서 국경없는의사회 차량을 봤을 때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국경없는의사회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즉시 지원서를 작성했고 ‘전문 환자’로 고용되었다. 내가 맡은 일은 에이즈(HIV) 테스트 전후 상담이며 또한 환자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곁에 있는 것이다.
나는 환자들 곁에서 일하는 것이 정말 좋다. 내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환자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재 나의 건강상태는 좋다. HIV 음성 판정을 받은 건강한 4살박이 아들도 있다. 그 전에 내가 낳은 5명의 아이들은 모두 생후 6개월 만에 사망했다. 17세인 큰 아들도 건강하다. 환자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고 내 경험과 치료를 계속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는 것이 환자들에게 힘을 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 소녀는 내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정말로 행복했었다.
환자 상담 외에도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십대 모임 멘토’를 맡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아동과 청소년들이 모여서 치료 진행 상황과 부작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이들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대학 진학을 포함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고 있다.
현재 아주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내 마음을 열어주었다.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햇빛으로 인도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 서비스를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킴으로써 환자들에게 직접 약을 제공하고 있다.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먼 길을 떠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늘 날 환자들이 치료를 계속 받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아니었으면 시셀웨니에 무덤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