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발병한 이후로 국경없는의사회 에볼라 치료센터에 입원한 환자는 4500여 명이며, 그중에 에볼라 감염환자는 2700명이 넘습니다. 힘겨운 고통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현재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의 국경없는의사회 치료센터에서는 수많은 환자들이 에볼라와 싸우고 있는데, 오늘 1000번째 생존자가 나왔습니다. 1000번째 에볼라 생존자 콜리 제임스의 이야기를 아버지 알렉산더 콜리가 전해 주었습니다.
2014년 9월 21일 일요일은 제 평생 잊지 못할 날입니다.
저는 국경없는의사회와 함께 일하는 보건 홍보직원으로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에볼라에 대해 알려 주는 일을 했었습니다. 가족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 증상이 보이기 시작하면 해야 할 일을 일러 주고,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국경없는의사회 긴급전화 번호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날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아내 번호로 누군가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수도 몬로비아에서 아이 셋을 돌보고 있었고, 저는 북부 지역 포야에서 일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에볼라가 라이베리아에 상륙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에볼라 바이러스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고 단단히 대비를 시키려고 했었는데, 아내는 도무지 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과 함께 몬로비아를 떠나 저와 함께 포야에 있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에볼라 같은 건 없다며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남동생 전화를 받았습니다. “형수님이 돌아가셨어요……”, “뭐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형수님이 돌아가셨다고요.” 저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집어 던졌습니다. 떨어진 휴대폰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아내와 저는 23년을 함께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그렇게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내뿐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저는 마치 인생의 모든 기록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제가 뭘 보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몬로비아에서 또 다른 전화를 받았습니다. 간호사로 일하던 남동생이 제 아내를 돌봐주고 있었는데, 남동생도 에볼라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제 어린 딸들도 몬로비아에 있는 치료센터에 입원했는데, 두 아이도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 힘도 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고,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몬로비아 집에는 이제 큰아들 콜리 제임스만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콜리는 아무 증상이 없었습니다. 콜리는 제게 전화를 걸어, “아빠, 식구들 전부 아프게 됐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라며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콜리에게 포야로 와서 같이 있자고 했습니다.
콜리가 오자 마을 사람들이 우리 둘을 거부했습니다. 식구들이 전부 에볼라로 죽었으니 콜리를 데리고 가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웃들 반응에 정말 화가 났습니다. 콜리에게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결국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콜리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였습니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구토나 설사 같은 증상은 없었지만 너무 피곤해 보였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볼라 긴급전화로 전화를 걸었고, 국경없는의사회 사람들이 와서 콜리를 치료센터로 데려갔습니다.
혈액 검사 결과 콜리는 에볼라 양성 반응이었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밤이었습니다. 단 1초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염려하면서 밤새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다음날, 국경없는의사회 상담사들이 저를 다독여 주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권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상담사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치료센터 안에서 울타리 너머로 콜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 콜리를 향해, “아들아, 네가 나의 유일한 희망이란다. 용기를 가져야 해. 주시는 약은 꼭꼭 챙겨 먹어야 한다.”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콜리는, “아빠, 잘 알아요. 그렇게 할게요. 울지 마세요. 저 죽지 않아요. 꼭 에볼라를 이길 거예요. 여동생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저는 꼭 살아남아 아빠를 자랑스럽게 해드릴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상담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저와 이야기를 나눠 주었습니다.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제가 겪는 일들이 결코 감당하기 쉬운 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제 아들이 얼른 그 곳을 나오길 바랐습니다. 콜리가 거기 있는 것을 보면 아이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이미 잃었지만, 아들은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콜리가 꿋꿋하게 잘 버텨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콜리가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콜리가 에볼라를 떨쳐버리고, 혈액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콜리의 두 눈이 아직 빨갛게 충혈되어 있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콜리와 함께 있고픈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눈으로 보기까지는 저도 결코 믿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콜리가 텐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저는 정말 콜리가 그 곳을 나올 수 있을지 믿지 못했습니다.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감염환자들도 바로 다음날 갑자기 죽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콜리도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콜리가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정말이지 너무도 기뻤습니다. 바라보던 제게 콜리는, “아빠 저 이제 괜찮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콜리를 힘껏 껴안아 주었습니다. 콜리가 텐트에서 나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콜리를 보러 왔고, 모두들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팀원들은 콜리가 1000번째 에볼라 생존자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지만, ‘살아남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콜리가 살아 있어서 너무 기뻤지만,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콜리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런 콜리를 보면서 저도 환하게 웃었습니다. 온종일 기분 좋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콜리를 위해 작은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했습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습니다. 이제 10학년인 콜리에게 졸업 후에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더니, 생물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콜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고 콜리가 꼭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뭐든지 할 생각입니다. 엄마를 떠나 보내면서 콜리가 곁에서 느꼈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습니다. 콜리에게, “이제 내가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되어 너를 돌봐줄게.”라고 말했더니, “저는 아빠를 위해서 뭐든지 할 거예요.”라고 콜리가 답했습니다. 콜리는 제가 포야로 불러 함께 있자고 말해 줘서 너무 기뻤다고도 했습니다. 치료센터에서 콜리가 받은 치료는 모자람 없는 훌륭한 치료였습니다.
이제 제 아들도 에볼라를 훌훌 털어버렸으니, 우리 둘은 이제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입니다. 콜리가 올해 열여섯 살이니 이제 어엿한 제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단지 아들이 아니라 친구 말입니다. 콜리는 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아내를 대신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제부터는 제 아들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 현재 국제 활동가 약 250명을 포함한 국경없는의사회 팀원 약 3000명이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에서 에볼라 대응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