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단 생명공학자 레베카 아초크(Rebecca Achok)가 주바의 국립 공중보건 연구소에서 코로나19 의심 환자의 샘플을 등록 및 처리하고 있다. ⓒ MSF/Tetiana Gaviuk
세계무역기구(WTO)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관련 지적재산권 일부를 완화할 것”에 대한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요청을 고려하겠다고 발표하기 앞서, 국경없는의사회는 모든 정부에 이 요청을 지지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 요청은 코로나19 대응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지적재산권 면제를 통해 각국 정부는 집단면역이 달성되어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모든 코로나19 치료제, 백신, 진단키트 및 기타 기술과 관련된 지적재산(IP) 및 특허의 허가∙집행을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은 20년 전 HIV/에이즈의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데, 당시 특허장벽이 없었던 국가에서 저렴한 HIV/에이즈 복제약을 생산하면서 수백만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제약회사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영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19 관련 의료 제품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적절한 가격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각국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모든 코로나19 의료 도구 및 기술은 ‘글로벌 공공재’로서 특허나 기타 지적재산권에 의한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의 건강이 걸려 있는 이 중대한 시점에 모든 정부가 기업의 이윤보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지적재산권 완화 제안을 지지할 것을 촉구합니다.”_ 시드니 웡(Sidney Wong) / 국경없는의사회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 캠페인(액세스 캠페인) 총괄 디렉터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제약회사들은 지적재산권을 철저히 통제하는 등 기존 관행을 고수하며, 불투명한 독점 계약을 통해 중저소득 국가들을 배제해왔다. 한 예로 길리어드(Gilead)사는 코로나19 치료제 후보인 렘데시비르(Remdesivir)에 대해 제한적인 양자 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복제약 경쟁을 통해 가격을 낮출 가능성을 차단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 인구의 절반을 렘데시비르 공급에서 배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치료제 후보로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여러 신규 및 용도가 변경된 의약품과 단일클론항체는 브라질, 남아공,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등 여러 중소득국가에서 이미 특허 등록이 완료됐다. 제약회사 한 곳을 제외한 모든 코로나19 백신 개발자들은 기존 관행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지적재산권을 등록하고 있다.
몇몇 기업은 전 세계적 제조 역량을 활용해 백신의 공급 부족 문제를 완화하고자 라이선스와 기술이전 협약을 체결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지만 이는 예외적인 사례이며, 일반적인 라이선스 계약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과거에도 제약회사들이 독점권을 활용해 의약품에 대해 과도하게 높은 가격을 유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진 바 있다. HIV/에이즈가 유행한 2001년 당시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선언’은 각국 정부가 특허 및 기타 지적재산권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리를 인정했고, 이를 통해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고 기업의 이익보다 공중보건이 우선시될 수 있도록 행동할 수 있었다. 이번 요청 역시 코로나19 대응을 가속화하기 위한 유사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남아공 칼리쳐Khayelitsha)의 국경없는의사회 코로나19 야전병원에 모인 코로나19 검사를 위한 검체 보관용 배지 ⓒ MSF/Rowan Pybus
“인도와 남아공이 보여준 이 대담한 행동은 20년 전 HIV/에이즈 유행 당시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기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HIV 치료제에 독점권이 부여되면서, 고소득 국가에서는 치료제를 구할 수 있었던 반면 중∙저소득 국가에서는 수백만 명의 환자가 사망에 이르기까지 방치되었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의료 도구에 대한 독점을 배제하면, ‘모든 사람을 위한’ 제조 및 공급, 접근성 확대에 포괄적 협력이 가능합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130만여 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각국 정부는 더 이상 업계가 자발적으로 행동하길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_코시 마부소(Khosi Mavuso) / 국경없는의사회 남아프리카공화국 의료 책임자
10월 15일과 16일 양일 개최된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Agreement) 위원회에서 케냐와 에스와티니는 인도, 남아공과 함께 면제 요청을 공식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외에도 본 안건은 현재까지 총 99개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일본, 캐나다, 브라질, 호주, 노르웨이, 스위스, 유럽연합 등 여러 고소득 국가에서는 면제 요청을 지지하지 않고 있으며, 대한민국 또한 현재까지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상태이다.
“각국 정부는 향후 이 팬데믹이 역사에 기록될 때, 역사의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_시드니 웡 / 국경없는의사회 액세스 캠페인 총괄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