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동안 국경없는의사회는 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기우안(Guiuan) 남쪽에 있는 5개섬에 의료물자와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배를 이용한 이동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 심리상담가 1명, 통역사 1명, 필리핀 보건단원 2명으로 이루어져있는 이동진료팀은 하루에 2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데 증상이 가벼운 경우는 섬에서 간단한 수술을 하고 복합적인 증상의 환자는 기우안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온 간호사 플로랑스 드뇌렝(Florence Denneulin)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강타한 지 일주일 만에 기우안에 도착했습니다. 해상 이동진료소 활동을 시작하기 전 저는 헬리콥터로 섬들의 상황을 평가했죠.
무엇보다도 도움이 시급하다고 판단되는 가장 고립된 섬으로 가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섬에 있는 모든 것들이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집이며 도로도 무너졌고 나무들도 뿌리 채 뽑혀 있었지요. 뽑히지 않은 나무는 잎사귀 한 장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깨진 유리 조각이며, 나무 조각, 철 조각 등 태풍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습니다. 심지어 보건소와 병원도 무너진 상태였지요.
의약품과 의료진이 도착하자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섬을 벗어날 유일한 수단인 배가 모조리 파손되는 바람에 주민들은 섬 외부 사람들과 전혀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정말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하루에 205명의 환자를 진료한 의사도 있었지요. 집이 무너지거나 나무가 쓰러지면서 다친 사람들이 많다보니 붕대처치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도처에 유리조각이며 깡통들이 널려있는 상황에서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슬리퍼를 신었다 해도 잔해가 워낙 많아 다리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고요.
섬 안에서 이동하기 위해 트럭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장도로가 아니다보니 비라도 내리면 길이 진흙탕이 되어 그나마 트럭조차 타지 못합니다. 그러면 진흙길을 그냥 걸어서 가야 합니다. 의약품이며 의료도구를 짊어진 채 언덕을 올라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온 의사 매즈 가이슬러(Mads Geisler)
지붕이 절반이라도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진료소를 설치하고 진료를 봅니다. 처음 진료를 시작할 무렵에는 하루에 100명 이상을 치료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보다는 줄었지만 제대로 환자들을 치료하기에는 아직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마을 정비 작업을 하다가 다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섬이라 도로를 정비할 불도저 같은 장비가 없다보니 날카로운 것에 발을 다치거나 베어서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감염 위험도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다보니 피부 감염이나 파상풍 환자가 많습니다. 파상풍은 매우 위험한 병인데 온갖 파편과 상처에 이곳 기후조건까지 더해져 그 위험이 더욱 큽니다. 이곳에서 주요 업무는 상처소독, 붕대치료, 파상풍 치료제 및 파상풍 주사 등의 의료처치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낙천적입니다. 태풍으로 무너진 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는데도 말이죠. 함께 재앙을 겪었다는 동질감이 위기를 대처하는데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트레스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심신문제를 겪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 고통, 불안, 팔다리 마비, 두통, 가슴 두근거림, 불면증 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아직 복구해야 할 기반 시설이 많습니다. 태풍이 섬 전체를 할퀴고 지나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덴마크에서 온 간호사 크리스틴 랑겔룬(Kristine Langelund)
간호사인 저는 일단 환자가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전에 상담을 합니다. 그래야 병의 경중을 가려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나는 환자가 있는데 아내와 4명의 자녀를 모두 잃은 40대 남성이었습니다. 온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참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가장 위중한 환자는 아니지만 무너진 집과 인생을 재건할 수 있도록 요통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갔던 섬 중 가장 작은 섬은 빅토리(Victory)입니다. 15분이면 온 섬을 다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지요. 섬에는 6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집들이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주민 15명은 아직도 실종상태인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어린이들입니다.
지나치게 고립된 섬들도 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 환자가 생각나네요.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힌 아이였습니다. 어지럼을 느끼다가 잠시 의식을 잃었더랬죠. 덴마크에서라면 그저 집에 가서 푹 쉬라고 말해줄 텐데 아이의 가족이 너무 겁에 질려 있는 거예요. 우리도 의료팀이 그 섬을 떠나면 2주 동안은 의료 서비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와 아이의 가족과 함께 기우안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브라질에서온 심리상담사 아나 세실리아 웨인트라웁(Ana Cecilla Weintraub)
“대부분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가능한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심리 상태가 심각한 경우도 있지만 태풍의 영향을 받은 환자는 절반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이미 태풍 이전부터 심리적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죠. 울고, 두려워하고, 잠시도 부모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동진료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부모에게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이해시켜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아이들에게 태풍으로 파괴되기 전 마을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또 마을이 복구되면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도 그려보라고 했지요. 두 그림을 한 장의 종이에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종이로 종이배를 만들고 소망을 담아 바다에 띄웠습니다. 아이들에게 내 고국 브라질에서는 해마다 이맘때면 새해에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런 의식을 한다고 이야기해주었지요.
주민들의 심리 건강은 마을 재건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물리적 환경이 나아지지 않거나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면 이들은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는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지요.
필리핀에서 활동을 시작한 후 두 달 동안 국경없는의사회 응급구호팀은 6만6795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1552명을 입원치료 했으며, 365건의 수술과 395명의 출산을 지원했다. 또한 재건, 쉼터, 위생용품 관련 키트와 조리도구 등 6만2925개의 인도적 구호 물품을 주민들에게 배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