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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필리핀: “마치 폭풍이 도끼로 나무를 내리찍은 것 같아요”

2024.12.17

가옥과 지역사회 센터 옥상 구조물이 찢겨 나가고, 잎과 가지를 잃은 나무 주위에는 판금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다. 산길은 산사태로 떠밀려온 진흙과 돌덩이, 나뭇가지로 뒤덮여 있다.

마치 폭풍이 도끼로 나무를 내리찍은 것 같아요. 오로라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어요.”_현지 주민 

현지에서는 페피토(Pepito)로 불리는 슈퍼태풍 만이(Man-yi)가 남긴 참상이다. 만이는 필리핀에서 한 달 새 여섯 번째 발생한 태풍으로, 11월 16일 카탄두아네스(Catanduanes)주 팡가니반(Panganiban)에 처음 상륙한 뒤 다음 날 오로라(Aurora)주 디파쿨라오 (Dipaculao)에 상륙하며 필리핀을 두 차례나 강타했다. 

11월 25일 국경없는의사회는 오로라주 디파쿨라오 소재 해안 마을 디나디아완 (Dinadiawan)에서 이동진료소 활동을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국경없는의사회는 보건부 및 주·지방 보건의료 종사자와 함께 일반 진료와 정신건강 및 심리사회적 지원, 외상 치료, 예방접종, 약품 제공, 아동 대상 영양실조 검사를 실시하는 등 지역 주민들에게 포괄적인 의료지원을 제공했다.

“바람이 매우 강했어요”

디나디아완은 디파쿨라오에 소재한 인구 약 5,000명의 해안 마을로 오로라주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다.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산길이 막히고, 폭풍해일로 해안 인근 구조물이 파괴되었다.

디나디아완 해안가에 위치한 리조트가 태풍으로 파괴된 모습. 2024년 11월. ©Regina Layug Rosero/MSF


태풍 경보가 발령되자 주민 다수가 디나디아완 초등학교로 피신했다. 델리아 매칼리페이(Delia Macalipay, 63세)는 가족과 함께 대피했다.

바람이 매우 강했어요. 우리는 위험을 피해 매트리스 뒤에 몸을 숨겼죠. 아이들 모두 거기 있었고, 저는 매트리스를 붙잡고 있었어요. 그때 제 발이 노출된 줄 몰랐고, 결국 바람에 유리창이 깨지면서 발을 다쳤어요. 유리 조각이 살에 박히지 않아서 다행이에요.”_델리아

그녀는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소로 찾아와 발 검사를 받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발이 빗물에 잠겨있던 탓에 부어올라 있었다.
 

우리는 5일 동안 총 549명의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다수의 환자들은 상기도 감염증을 앓고 있었고, 상태가 불안정한 60세 이상 고혈압 환자들도 많았습니다.”_닥터 마르베 두카 페르난데스(Dr. Marve Duka-Fernandez) / 국경없는의사회 필리핀 태풍 만이 대응 의료팀 책임자


그 외 다양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도 많았다.

폭풍이 발생하는 동안 또는 이후에 수습 및 복구 작업 중 다양한 사고로 인해 열상이나 자상, 머리 부상을 입은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개한테 물려 교상을 입은 환자들도 있었고요. 재난 이후에 볼 수 있는 흔한 부상 종류지만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거나 감염이 발생할 수 있어 위험하죠. 부상자들은 복구 또는 수습 작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치료를 받으러 가지 못하거나 가족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상처는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요.”_닥터 마르베 두카 페르난데스

“집이 산사태에 휩쓸려갔습니다”

로잘린다 타빌(Rosalida Tabil, 41세)은 팔에 상처를 입은 채 이동진료소를 찾아왔다.

가족에게 먹일 정어리 통조림을 열려고 했어요. 캔 따개는 없고 칼만 있었는데, 칼이 미끄러지면서 팔을 찔렀죠.”_로잘린다 타빌

타빌과 그녀의 가족은 친척들과 함께 대피했다. 안전한 곳으로 급히 대피하느라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떠나야 했다. 타빌의 자녀들과 다른 가족들을 포함해 여덟 명이 작은 공간에 빽빽하게 모여 머리 위 지붕이 바람에 뜯겨 나가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다 . 자택이 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해안가 근처 저지대로 대피했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위해서 다리를 세 번이나 건넜어요. 집은 확인하러 다시 가보니 사라지고 없더군요. 산사태에 휩쓸려갔죠.”_로잘린다 타빌

자택과 함께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이 같이 휩쓸려갔다. 


정신적 고통: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요?”

국경없는의사회는 이동진료소와 함께 정신건강 지원 활동도 전개했다 . 정신건강 책임자 사라 제인 디오캄포(Sarah Jane Deocampo)는 환자들과 재난 경험이나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총 55명을 대상으로 심리교육 세션을 실시해 정신건강 필수 지식과 대처 방법을 제공했다. 또한 35명에게 심리적 응급처치(Psychological First Aid, PFA) 개별 상담을 제공하고, 11명의 지역사회 대응인력 및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그룹 세션을 진행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이들 중에는 고령 환자가 많았습니다. 대부분이 여성이긴 했지만, 이번 재난과 관련해서 자신의 경험과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는 남성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환자들은 가족을 돌보거나, 집과 삶을 재건하고, 재난 이후에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 데 너무 집중해 정작 자신의 부상과 건강, 감정을 보살필 여력이 없습니다. 마침내 상담을 받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를 찾아오면 울음을 터뜨리고 두려움과 좌절감을 털어놓죠. 이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절망이 아닌 다른 감정도 느끼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_사라 제인 디오캄포 


에반젤리나 라미로(Evangelina Ramiro)는 가족들이 진료를 받은 이후에야 개별 심리상담 세션을 받는 데 동의했다.

에반젤리나는 자녀 둘과 언어 장애를 가진 손주 둘을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73세인 지금까지 온 가족을 부양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자녀들은 오로라주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정신은 여전히 괜찮지만, 몸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요?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지도 못하는데 말이죠’라고 했어요. 그래도 상담 세션이 끝나고 ‘고마워요, 젊은 친구. 덕분에 잠시나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라고 말해주었죠.”_사라 제인 디오캄포

접근 및 지원 수요 평가 어려움
 
태풍 만이는 이전 태풍 피해에서 아직 회복 중인 다수의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국경없는의사회는 피해 지역사회의 지원 수요를 평가하기 위해 비콜 지방(Bicol Region)의 카탄두아네스(Catanduanes)주와 루손섬(Luzon) 북부 및 중부에 있는 카가얀(Cagayan), 이사벨라(Isabela), 누에바 비스카야(Nueva Vizcaya), 오로라 지역을 방문했다.

카가얀, 이사벨라, 누에바 비스카야, 오로라 내 수요를 평가하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팀은 지역사회까지 편도로 4-5시간 운전해서 갔다가 또다시 4시간에 걸쳐 카가얀 투게가라오시(Tuguegarao City)로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길 반복했어요. 하루에 고작 하나, 운이 좋으면 두 지역에 갈 수 있었어요. 하루는 도로에서 14시간 이상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오로라주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다시 돌아가야 했어요. 심각한 산사태로 길이 막히고 지역 당국이 누구든 지나가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거든요. 또 다른 어려움은 필리핀에서 한 달 새 폭풍이 여섯 차례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피해 지역 중에서 가장 최근 폭풍으로 최대 피해를 입은 지역이 어디인지, 수요가 가장 많은 지역은 어디인지,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인지 파악해야 했습니다. 현지 대응 및 보건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달에 한두 차례 폭풍이 일어날 것에 대비했는데, 여섯 차례나 발생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죠.’”_데릴 본 아벨론(Daryll Von Abellon) / 국경없는의사회 기술직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 기술직 활동가이자 간호사인 데릴 본 아벨론이 발에 부상을 입은 환자를 돌보고 있다. 2024년 11월. ©Regina Layug Rosero/MSF

오로라주의 주도 발레르(Baler)에서 디파쿨라오의 디나디아완 지역으로 가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팀은 산과 바다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한 도로를 거의 2시간 동안 운전해서 이동해야 했다. 디파쿨라오 소재 이동진료소는 해안에서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도로에 설치되었는데, 해안가에는 여전히 나무 등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디나디아완 이동진료소에서 일주일 동안 대응 활동을 전개한 후 오로라주 보건소 소속 의료보건 종사자 30명을 대상으로 심리적 응급처치 훈련을 실시했으며, 2024년 12월 2일자로  긴급대응 활동을 마무리했다.